책을 사놓고 읽는 걸 미루고 있었다. 제주 4.3 사건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나로서는 솔직히 이 소설을 읽기가 무서웠다. 그러다 2월 중순 어느 날, 갑자기 번쩍 이런 생각이 들었다.
3월이 오기 전에 읽어야 해!
'3월이 오기 전' 이라는 시간적 제한이 그어진 이유는 3월 중순에 내가 제주에 갈 일이 있기 때문이다. 3월 중순 전에 반드시 이 책을 읽어야 한다는 의무감이 들었고 그리하여 25년 2월에 읽은 마지막 책- 밀린 숙제 해치우듯 읽은 책이 되었다.
이 책은 작가인 경하가 친구 인선의 이야기, 정확히는 인선의 어머니가 겪은 4.3의 이야기를 듣는 듯 진행된다. 그런데 진행 방식이 좀 독특하다. 우선 경하는 한강 작가 본인인 듯한 느낌을 주며, 1부에서 인선은 큰 사고를 당한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2부에야 시작되는데 1부가 RPG 게임 주인공의 모험을 보는 느낌이라면, 2부는 하나의 회고록처럼 읽었다. 그런데 문득 후반부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제주 4.3에 대해 잘 모른다면 2부는 스릴러 혹은 공포물처럼 보이겠다. 그리고 3부 맺음을 보면서는 '이 이야기는 사랑이구나. 로맨스네.' 라고 생각했다.
책을 다 읽고 인터넷 서점에서 한줄평을 찾아보니 역시나 2부에 대한 평이 많이 나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내 예상처럼 무서워서 이불을 뒤집어 쓰고 읽었다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더 참혹했다. 내가 아는 4.3에 비하면 이 책은 매우 매우.. 순한 맛이다.
제주는 내가 잠시 살았던 곳이기도 하고, 지금도 여전히 사랑하는 곳이기에 이번 책 감상에는 개인적인 이야기가 많이 나올 예정이다.
다만 감상 자체는 접어둔다. 다 쓰고 보니 너무 길기도 하고, 책을 안읽은 분도 있을테니...ㅎ
1부 새
1. 결정
어떤 사람들은 떠날 때 자신이 가진 가장 예리한 칼을 꺼내든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안다.
내가 그런 면이 있어서 적어둔 문장인데, 이 책을 다 읽고 돌이켜보니 여기서의 '어떤 사람들'이 보였다.
진짜 작별들이 아직 전조에 불과했던 시기에 '작별'이란 제목의 소설을 썼었다. 진눈깨비 속에 녹아서 사라지는 눈-여자의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게 정말 마지막 인사일 순 없다.
녹아 사라지는 게 정말 마지막 인사일 순 없다면, 한강 작가가 생각하는 작별은 진짜 마지막 인사를 할 때인가. 그 진짜의 기준은 뭘까?
2. 실
총에 맞고, 몽둥이에 맞고,
칼에 베여 죽은 사람들 말이야.
얼마나 아팠을까?
손가락 두 개가 잘린 게 이만큼 아픈데.
그렇게 죽은 사람들 말이야, 목숨이 끊어질 정도로 몸 어딘가가 뚫리고 잘려나간 사람들 말이야.
인선이 사고를 당하고 수술을 받고 처치 받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3분마다 찔러야 하는 바늘 표현이 나를 찌르듯 괴로웠다.
하지만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스스로에게 부끄러운 부분이 이거다. 인선이 바늘로 찔리는 치료 과정은 저렇게 죽어나간 사람들에 비하면 낮은 강도의 고통일 수 있다. 머리로는 그걸 알았지만 이 부분이 가장 읽기 괴로운 부분이었다. 아마 경험의 차이이지 않을까 싶다. 어딘가에 찔린 고통, 치료로 인해 더 아픔을 겪는 경험은 있지만 목숨이 끊어질 정도로 몸 어딘가가 뚫리고 잘려본 적은 없으니까.
3. 폭설
내가 다친 걸 진작 알았다고 그때 엄만 말했어. 병원에서 연락오기 전에 이미 알고 있었다고. 내가 축대에서 떨어졌던 그 밤에 꿈을 꿨다고 했어. 다섯 살 모습으로 내가 눈밭에 앉아 있었는데.
내 뺨에 내려앉은 눈이 이상하게 녹지를 않더래. 꿈속에서 엄마 몸이 덜덜 떨릴 만큼 그게 무서웠대. 따뜻한 애기 얼굴에 왜 눈이 안 녹고 그대로 있나.
엄마들은 신기하다. 어떻게 꿈으로 알까. 나의 엄마도 그런 면이 있다. 근데 이때는 그냥 마냥 신기하다고만 생각했는데
수십 년 전 그 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어. 어린 자매가 가족들의 시신을 찾아내 장사를 치른 과정에 대해서도, 그후 어떤 끈기와 행운으로 살아남았는지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지 않았어. 오직 그 눈에 대해서만 말했을 뿐이야. 수십 년 전 생시에 보았고 얼마 전 꿈에서 보았던, 녹지 않는 그 눈송이들의 인과관계가 당신의 인생을 꿰뚫는 가장 무서운 논리이기라도 한 것처럼.
인선의 어머니가 (이보다 앞서 대충 예상은 했지만) 4.3 사건의 피해자, 유족이란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인선의 가출과 어머니 이야기에서 여러 차례 먹먹해짐을 느꼈다.
키우던 새에게 물을 줘야 한다는 퀘스트(?)를 인선이 경하에게 주면서 경하는 제주로 갔다.
경하가 제주에서 버스를 타고 헤메는 모습을 보며 처음에는 지난 1월 제주 다녀올 때 반대 방향 버스를 탔던 게 떠올랐다. 다만 그 땐 강풍은 불었지만 날씨 자체는 좋아서 반대 방향 버스를 탄 게 오히려 풍경 감상하는 좋은 기회였다는 큰 차이가 있었다. 오히려 경하의 모습과 비슷했던 때는 이제는 몇 년도인지 기억도 안나는 오래 전 겨울, 서귀포에 있다가 엄마가 아프다는 연락을 받고 부랴부랴 공항을 향해 갔을 때였다. 하필 눈이 많이 온 날이었고 바람도 심했다. 공항 버스가 공항을 못들어간다고 해서 공항 근처에 내려서 눈보라를 헤치고 공항으로 뛰어갔던 경험이 있다. 내 인생 가장 숨찼던 순간 다섯 손가락 안에 들지 않을까.
4. 새
그걸 당신에게 물으려고 이 사람이 한국에서 왔습니다.
마침내 노인이 입술을 떼었다. 통역자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으며, 놀라운 집중력으로 오직 카메라만을 응시한 채 대답했다.
좋아. 내가 이야기해줄게
문득, 내가 작년 재작년에 회사에서 힘겨운 싸움을 하면서 누군가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 회사 다니는 사람들은 사과하면 큰일나는 줄 아는 거 같아. 사과가 지는 거라고 생각하는 거 같아. 이런 회사 처음이야."
생각해보면 우리나라 정부도 사과를 잘 안한다. 일본도 우리나라에 사과 안하지만, 우리나라도 베트남에게 제대로 된 사과를 했던가?
입맛을 쉽게 잃지 않는 사람은 오래 산대. 엄만 오래 사실 거야.
고양이를 키우기 시작할 때 들었던 말이 생각났다. 식욕을 잃으면 그때가 큰일난 거라고.
엄마가 항암 치료를 받을 때도 그런 말을 들었다. 암 환자는 암 그 자체보다 영양 실조로 목숨을 잃는 경우가 많다고. 항암 치료가 식욕을 많이 떨어뜨리기 때문에.
이 장에서는 인선이 위급한 상황이 되었다는 암시가 있다. 그 때 새가 죽은 건 아닐까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또한 나라면 저런 기상 상황에서 저렇게 경하처럼 새를 구하러 갈 수 있었을까. 어떤 사명을 갖고 간 걸까.
5. 남은 빛
새는 어떻게 됐을까.
오늘 안에 물을 줘야 살릴 수 있다고 인선은 말했다.
그런데 새들에게 오늘은 언제까진가.
고양이에게 인간 세상의 1년은 4년과 비슷하다는 게 문득 떠올랐다. 내 고양이들은 어느덧 나와 나이가 비슷해져버렸다. 곧 내 나이를 추월하겠지. 오래 오래 건강하게 같이 살고 싶은 내 맘을 이 아이들은 알고 있을지.
한편 나도 사고 당해서 정신없는 상황이 되면 - 정확히는 집에 누가 갈 수 없는 상황이 되면 내 고양이들은 어쩌나.. 생각이 든다.
무엇을 생각하면 견딜 수 있나.
가슴에 활활 일어나는 불이 없다면.
기어이 돌아가 껴안을 네가 없다면.
그냥 인상적이라 적었는데 알고보니 이게 뒷표지에 있는 부분이었다.
솔직히 3. 폭설 때까지만 해도 RPG 게임의 모험을 간접적으로 겪는 듯한 느낌이었으나, 4. 새부터 '아 좀 불안한데..' 싶더니 여기서는 조바심이 났다. '빨리 힘을 내서 가줘...!' 하는 간절함이랄까?
길을 잃고 눈과 싸우다 경하의 의식이 혼미할 때 독립군 할머니 이야기, 인선의 새 이야기가 지나가고 처음으로 4.3으로 추측되는 이야기가 나온다.
대만에서도 삼만 명, 오키나와에서는 십이만 명이 살해되었는데요.
인선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침착했다.
그 숫자들을 생각할 때가 있어요. 그곳들이 모두 고립된 섬이었다는 것에 대해서도.
문득 서귀포에 있다는 P읍은 어디일까.. 생각이 들었다. 해안도로를 달려 도착한다는데. 세천리는 대구 달성군에 있다는 거 봐서 이 책 속 가상의 지명 같은데. 실제 지명은 어딜까.
산중간이라는 것 외에 알 수가 없다. 4.3의 희생지가 한 둘이 아니니 하나하나 찾을 수도 없다.
사실 그걸 의도한 것일 수도 있다. 제주 온 섬이 4.3의 희생지였으니, 특정한 곳으로 규정짓고 싶지 않은 의도일 것이라 생각이 든다.
6. 나무
이제 더 할 일이 없다.
위 문장은 반어라고 봐야 할 것 같다. 이야기는 오히려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인선의 마지막 영화 언급이 나오자 문득 인선이 어떤 영상을 찍었었는지 언급했던 초반부가 떠오른다. 베트남 한국군 피해자, 만주 독립군 할머니, 그리고 그 페이지를 읽을 땐 그냥 지나갔었던 인선 자신의 인터뷰. 그게 1948년 제주 이야기라는 걸 그때는 너무 대충 지나갔다.
1948년 미군 기록물이라는 자막 위로, 해안선에서부터 오 킬로미터를 표시하는 경계선이 두드러진 굵기로 그어져 있었다. 한라산을 포함하는 그 안쪽 지역을 소개(疏開;분산시키다)하며, 해당지를 통행하는 자를 폭도로 간주해 이유 불문 사살한다는 내용의 포고문이 자막으로 이어졌다.
이 내용을 4.3을 다룬 어느 프로그램에서 보았다. 이후 내용이 슬슬 괴로워진다.
죽으려고 이곳에 왔어.
생각보다 4.3에 대한 이야기가 늦게 모습을 드러낸다. 1부가 책 전체의 절반인데. 2부에 얼마나 몰아치려고 이렇게 단단히 다져놓은 것일까, 앞으로의 일이 조금 두렵다.
2부 밤
1. 작별하지 않는다.
작별인사만 하지 않는 거야, 정말 작별하지 않는 거야?
완성되지 않는 거야, 작별이?
미루는 거야, 작별을? 기한 없이?
인선과 경하가 하려던 일의 프로젝트 명이 드러난다. 그 얘기인 즉슨 이 책 자체가 그 프로젝트인 것이다.
왜 나한테까지 아무렇지 않은 척한 걸까? 아프다 해도 나는 천적이 아닌데.
우린 대화를 나눴어, 너도 봤지.
사실은 어떤 말도 나눠진 적 없었던 걸까? 새는 새였고, 나는 인간이었을 뿐일까?
하지만 모든 게 끝난 건 아니야.
정말 헤어진 건 아니야, 아직은.
경하가 죽은 건지, 인선과 아마가 죽은 건지 모르겠다. 그건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동안 궁금했던 것들이 하나 하나 드러나고 있으니까.
2. 그림자들
어떤 말을 중얼거린 다음에, 그걸 부인하려고 좀더 큰 소리로 아니라고 말하는 버릇이 생겼어.
혼이 들어선 안 되는 말, 정말로 혼들이 들어줄지 모를 소원…… 그런 걸 뱉은 다음에, 종이에 쓴 걸 찢어버리듯이.
그러니까 아미한테는 뒤의 말만 제대로 들렸을 거야. 내가 그렇게 우는 동물인 줄 알고 따라 했는지도 모르지.
앞서 경하는 아미가 '아니 아니'를 배운 이유를 궁금해했다. 저런 이유로 아미가 '아니'라는 말을 배운 거라면. 그리고 아미의 혼이 이따금 인선의 집으로 와서 놀다 가는 게 사실이라면. 아미는 충분히 인선에게 애정을 갖고 교류하고 싶었던 거 같은데, 왜 아픈 티를 내지 않았을까.
경하가 저 말 다음에, 무슨 소원인지 알 거 같다던 소원은 p25에 언급된 주문일까.
처음부터 다시 써.
진짜 작별인사를, 제대로.
1부 새 - 1. 결정을 다시 읽어야겠다 생각이 들어 다시 읽었다. 처음 읽을 때와 달리 보인 부분이 있었다.
3. 바람
바람의 속력이 뺨과 콧날에 느껴진다.
익히 알고 있는 끔찍한 학살의 이야기가 인선과, 인선이 건넨 자료집에 있는 어떤 어멍의 인터뷰를 통해 나온다.
앞서 있던 인선의 아버지 이야기-동굴 이야기를 다시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p157부터 나오는 인선의 증언 같은, 아버지의 이야기. 다시 읽으니 알겠다. 동굴에 숨어있다 경찰에 잡히기 전까지의 일주일 이야기를 한 거였단 걸.
이쯤부터 이 소설이 스릴러가 된 느낌이 살짝 들었다. 정확히는 내가 스릴러로 느낀 건 아니고, 4.3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다면 스릴러나 공포로 보일 수 있겠다 생각이 문득 들었다.
4. 정적
마지막 영화는 '아버지의 역사에 부치는 영상 시'라는 영화제 기획자의 우호적인 촌평을 부제처럼 매달고 상영되었는데. 지금처럼 미간에 주름을 만든 채 인선은 그 말을 반박했다. 아버지를 위한 영화가 아닙니다. 역사에 대한 영화도 아니고, 영상 시도 아니에요.
여기서는 인선의 가족이 겪은 4.3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이전 장에 나온 어멍이 마지막에 만난 사람이 인선의 아버지였다는 건 놀라웠다.
돌이 됐다고 했지, 죽었다는 건 아니잖아요?
그때 안 죽었는지도 모르잖아요. 저건 그러니까… 돌로 된 허물 같은 거죠.
허물을 벗어놓고, 여자는 간 거야!
소개선이 가른 운명, 그리고 인선과 경하가 말 놓은 계기가 됐던- 돌이 된 여자의 이야기. 연결선이 있어보인다. 뭔가 비슷하다. 도망갈 기회가, 그렇게 해서 살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는 게.
거기 있었어, 그 아이는.
p250 이야기는 p84 이야기의 뒷 얘기다. 그래서 앞으로 돌아가 다시 읽다가 3. 폭설을 다시 끝까지 읽었다. 다시 읽으니 전보다는 덤덤하게 읽었지만 이 소설에 왜 유독 눈이 많은지, 한강 작가의 다른 작품 <흰>에는 왜 눈과 새 언급이 있는지가 갑자기 이해되었다.
5. 낙하
역전 위령제에 관한 기사가 아직 펼쳐져 있다. 나는 촛불을 옮겨 다시 사진을 본다. 군중의 삼분의 이가량이 여자들이다. 긴 소복의 허리를 동여매거나 무릎까지 오는 흰 원피스를 걸친 수백 명의 여자들이 플래카드를 향해 서 있다.
역시 여성은 강하다. 특히 인선의 어머니는 더욱...
유가족들의 피맺힌 원을 받들어 십 년 세월 그리던 임을 만나 고이 쉬게 해드릴 날이 곧 옵니다
한강 작가가 4.3 유가족들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경북 지구 피학살자 유족회의 메시지를 빌어 하고 있는 것이라고 느꼈다. 나도 바라는 바다.
그후로는 엄마가 모은 자료가 없어, 삼십사 년 동안.
인선의 말을 나는 입속으로 되풀이한다. 삼십사 년.
……군부가 물러나고 민간인이 대통령이 될 때까지.
인선의 엄마, 그리고 외삼촌의 이야기가 이어지는 가운데, 장 초입의 무인 잠수정 이야기가 인선의 반응과 오버랩된다. 그래서 낙하인가 싶다.
6. 바다 아래
제목만 봤을 때 느낌은- 그렇게 낙하한 해저 생물체의 사체가 연니가 된, 그 바다 아래인가 싶었다
얼마나 더 깊이 내려가는 걸까, 나는 생각한다. 이 정적이 내 꿈의 바다 아랜가.
좀 우스워보일 수 있지만, 나는 이 대목에서 영화 <인셉션>의 림보가 떠올랐다. 바다 아래까지 갔다는 건 곧 이 이야기의 끝이 다가온다는 뜻이기도 할 거다.
그 사람이 외삼촌이었다면 어떻게든 이후에 섬으로 돌아왔을 거라고...... 하지만 확신할 수 있을까? 그런 지옥에서 살아난 뒤에도 우리가 상상하는 선택을 하는 사람으로 남을 수 있었을까?
어쩌면 갱도 속에 쌓인 수천 구의 몸들 중 하나일 수도 있고, 유일한 생존자일 수도 있는 인선의 외삼촌. 만약 후자였다면 나라면... 제주로 돌아가지 못했을 거다. 인선의 말대로 그런 지옥에서 천신만고 끝에 살아났다면 과거를 모두 지우고 잊고 싶었을 거다. 피투성이 수의를 얼른 태워버리라는 말에는 그런 두 가지 의미가 있을 거다. 나에 대한 증적을 남기지 마라 - 라고 옷을 준 이에게도, 자기 자신에게도.
3부 불꽃
뻐근한 사랑이 살갗을 타고 스며들었던 걸 기억해. 골수에 사무치고 심장이 오그라드는…… 그 때 알았어. 사랑이 얼마나 무서운 고통인지.
인선이 어머니를 간병하던 이야기를 할 땐 엄마가 외할머니를 간병하던 시절이 떠올랐다. 매우 흡사해서.
한편 인선의 어머니가 투병 중 한 행동을 보며 그렇게 강했던 분이 얼마나 한에 사무쳤을까 생각에… 여러 생각이 더해졌다.
이상하지. 엄마가 사라지면 마침내 내 삶으로 돌아오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돌아갈 다리가 끊어지고 없었어. 더이상 내 방으로 기어오는 엄마가 없는데 잠을 잘 수 없었어. 더이상 죽어서 벗어날 필요가 없는데 계속해서 죽고 싶었어.
외할머니를 보낸 후 엄마도 그랬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에 <들풀의 구원> 감상문에도 언급한 적 있지만 간병은 정말 고통스럽다. 끝이 언젠지 모르기에 더욱 그러하다.
들풀의 구원 - 빅토리아 베넷
알라딘에서 편집장의 추천 8월 9일자에 뜬 거 보고 책 소개 읽다가 궁금해서 구매했고 2024년 9월에 읽었다. TMI인데 나는 새로운 책을 찾아볼 때 알라딘 - 편집장의 추천 코너를 참고하는 편이다.
kim-lotus-root.tistory.com
그들이 왔구나.
무섭지 않았어. 아니, 숨이 쉬어지지 않을 만큼 행복했어. 고통인지 황홀인지 모를 이상한 격정 속에서 그 차가운 바람을, 바람의 몸을 입은 사람들을 가르며 걸었어. 수천 개 투명한 바늘이 온 몸에 꽂힌 것처럼, 그걸 타고 수혈처럼 생명이 흘러들어오는 걸 느끼면서. 나는 미친 사람처럼 보였거나 실제로 미쳤을 거야. 심장이 쪼개질 것같이 격렬하고 기이한 기쁨 속에서 생각했어. 너와 하기로 한 일을 이제 시작할 수 있겠다고.
나는 마지막 장을 읽고 '이 이야기는 사랑이구나. 로맨스네.' 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마지막 작가의 말을 읽는데 '이것이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이기를 빈다.' 라고 맺는다. 그럴 수 밖에 없다. 이게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앞서 2부에 대한 평이 갈린다고 했지만, 내 경우는 다음 전개 내용이 너무 궁금해서 책 읽다 끊기는 상황이 짜증날 정도였다.
하필 이거 읽을 때 회사 및 개인사로 바빠서 책 읽을 시간이 평소보다 부족했다... 으으...
짬나면 언제든 읽을 수 있도록, 읽던 책은 집에서든 회사에서든 어디서든 가까이 두는 편인데 가끔 책 사이 끼워진 책갈피를 보며 '하 다음 내용 궁금해 죽겠는데 언제 읽지…' 하는 경험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제주에서 사계절을 겪어본 사람으로서 이 책은 제주 특유의 바람 소리를 매우 실감나게 잘 표현했다 생각한다. 제주 특유의 바람 소리와 무서운 눈보라는 겪어본 사람만 알 수 있을 것인데, 그걸 내 능력으로는 표현할 수 없다. 그런데 한강 작가는 그걸 해낸다. (p147 비명 같은 바람소리, p166 신음 같은 바람, p176 눈 표현 등) 그래서 이 책을 읽고 있자니 제주의 바람과 눈보라를 겪은 경험이 절로 되살아났다. 한편 그렇기에 더욱 2부가 스산하고 스릴러나 공포물 같은 느낌이 날 수 있다.
그러고보면 난 서울 태생인데 제주에서 근무를 했고, 광주 연고의 야구팀을 응원하고 있다. 내가 직간접적으로 걸치고 있는 지역들은 공권력에 의해 무고한 희생을 당한 경험이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물론 전국 각지에서 그런 것이 있었지만(6월 항쟁, 부마항쟁, 여순사건 등등) 제주와 광주는 거의 대표적 사례로 언급될 정도의 일이 있었던 곳이니. 뭔가 운명 같기도 하다.
제주4.3사건과 광주민주화운동의 공통점 - 작별할 수 없다, 현재는
내가 아는 4.3에 비하면 이 책은 매우 순한 맛이라고 언급했다. 물론 나라고 4.3에 대해 그렇게 많이 아는 건 아니지만.. 제주에 살 때 4.3에 대해 좀 알아보자 싶어서 여기 저기 많이 돌아다녔었다. 그런데 정작 내게 가장 큰 충격을 준 건 제주4.3평화공원에서 봤던 이 장면이었다.

4.3 희생자 발굴유해 유가족 찾기
유전자 검사 채혈 신청 접수
이게 의미하는 게 무엇이겠는가? 4.3은 한국전쟁 전후로 있었던 사건인데 그 유가족을 아직도 못찾은 케이스가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아직 발굴되지 않은 유해도 있을 것이다.
4.3 사건으로 당시 제주도 인구의 1/9가 희생됐고, 10세 이하 희생자도 5% 가량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아직 사건 진상 규명이 제대로 되지 못해 그저 '사건'으로 되어 있고 제대로 이름도 붙여져 있지 않다. 위에 접어놓은 감상문 중 1부 4. 새 부분에 아래와 같이 언급한 부분이 있다.
문득, 내가 작년 재작년에 회사에서 힘겨운 싸움을 하면서 누군가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 회사 다니는 사람들은 사과하면 큰일나는 줄 아는 거 같아. 사과가 지는 거라고 생각하는 거 같아. 이런 회사 처음이야."
생각해보면 우리나라 정부도 사과를 잘 안한다. 일본도 우리나라에 사과 안하지만, 우리나라도 베트남에게 제대로 된 사과를 했던가?
이처럼 우리나라 정부도 사과를 잘 안한다고 했는데 4.3 사건도 대통령의 공식 사과가 고 노무현 대통령 때인 2003년에야 있었다.
예술 작품이든 책이든 감상은 개인의 몫이라고 생각하지만 이 책에 대한 평 중 "5.18 4.3 이제는 작별해야 한다" 라는 평에는 동의할 수도, 공감할 수도 없다. 아직 제대로 만나지도 못했는데 어떻게 작별한단 말인가? 회자정리 거자필반(會者定離 去者必返)이라 했다. 작별하고 싶다면 우선 만나야 한다. 떠난 이들이 돌아오고 제대로 정리하는 만남이 있어야만 작별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전까지는 작별할 수 없다.
내돈내산이자 내가 쓴 독후감/서평 57편 :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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