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다독다독 2025

살 만한 삶과 살 만하지 않은 삶 - 주디스 버틀러, 프레데리크 보름스

by 김연큰 2025. 3. 10.

이 책을 읽게 된 계기는 '주디스 버틀러' 이름 하나 때문이었다. 버틀러와 프레데리크 보름스가 나눈 두 개의 대담을 정리한 책으로 148쪽이라는 페이지 수가 알려주듯 책은 매우 얇다. 2025년 3월은 개인적으로 자꾸 바쁜 일이 생겨서 얇은 책 위주로 읽고 있는데, 금방 읽겠지 생각으로 섣불리 달려든 건 나의 실수였다. 서문을 읽고 나서 너무 어려워서 본문 들어가기 전에 책 맨 뒤에 있는 옮긴이 해제를 먼저 읽었다. 결과적으로 그게 서문 뿐 아니라 책 전반의 이해에 도움을 주었다.

살 만한 삶이 기본적인 생존과 번영의 조건이 충족되면서 기쁨과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삶이라면, 살 만하지 않은 삶은 생명을 존속하게 하는 필수적 자원이 부족해서 극심한 박탈감을 느끼면서도 살아 있는 존재의 모순적 상황일 수 있다. (옮긴이 해제 중)

 

우리의 삶은 살 만한가.

살 만한 삶이란 무엇이며 살 만하지 않은 삶은 무엇인가.

 

첫 번째 대담은 수백만 명의 난민 수용 문제로 유럽 사회가 심각한 사회적 갈등을 겪고 있던 2018년 4월에 있었고, 두 번째 대담은 코로나 팬데믹이 전 세계로 확산되며 그 위험이 고조되었던 2022년 4월이라 이런 주제를 논하기 좋은 상황이었다고 본다.

 

이 책을 읽은 소감을 먼저 적자면 -  초중반 내용 이해가 나에겐 어려웠다. 두 번째 대담인 "후기"에 들어서는 꽤 재밌고 읽을만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책을 두 번 이상 읽을 것인가? 라고 한다면.. 그건 아닐 듯 하다. 하지만 "우리의 삶은 살 만한가, 살 만한 삶과 살 만하지 않은 삶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확실히 생각해볼 주제라고 생각한다.

 


 

살 만한 삶과 살 만하지 않은 삶

나는 이 책을 읽기 전에 왜 제목이 <살 만한 삶과 그렇지 않은 삶>이 아니라 굳이 <살 만한 삶과 살 만하지 않은 삶>이라고 했을지가 궁금했다. 책을 읽은 후 내가 내린 결론은 '살 만하지 않은 삶'에 대한 버틀러와 보름스의 생각 차이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보름스의 의견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p39 / 살 만하지 않은 삶은 (…) 비유할 수 있다면 그것은 죽음보다 더한worse 것인데, 왜냐하면 삶이 계속되는데도 삶을 삶으로 만들어주거나 누군가가 그 삶을 살아가게 해주는 것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p45 / 살 만하지 않은 삶은 죽음보다 더 나쁜데, 이런 삶은 지속된다고 해도 그 사람이 그 삶을 자신의 삶으로 살 수 없고, (…) 죽음과 죽음보다 더한 것 중에서 선택을 해야 한다는 딜레마입니다.
이런 경험을 하면서 사는 사람들은 그런 경험을 기술할 수가 없고, 그것이 바로 다른 사람들이 그 경험을 기술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런 경험에 대해 말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살 만하지 않은 삶을 살아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이들의 살 만하지 않은 삶을 기술할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즉 보름스는 살 만한 삶의 객관적 조건을 중시하고 살 만한 삶과 살 만하지 않은 삶 사이의 명확한 경계를 유지하려 하는 면이 있다. 특히 '살 만하지 않은 삶'은 죽음보다 더 좋지 않은worse 상황이고 따라서 그 삶을 사는 이들이 경험을 기술할 수 없다고 선을 긋는다.

 

반대로 주디스 버틀러는 어떤 삶이 보호받을 가치가 있고, 추모되고 애도할 만한지를 결정하는 차별적 프레임을 타파하고자 한다. 버틀러는 주체가 자신의 경험을 어떻게 의식하고 어떤 의미를 끌어내는지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p51 / 저는 살 만하지 않은 삶을 기술하는 것이 살 만하지 않은 삶에 대한 증언이라고 정말로 생각합니다.
p59 / 주체를 상호주체성으로 언급해야 하는 이유는 당신의 삶이 살 만하지 않고서는, 그리고 수많은 삶들이 살 만하지 않고서는 나의 삶도 살 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 59 페이지의 이 문장이 정말 감명깊었다. "수많은 삶들이 살 만하지 않고서는 나의 삶도 살 만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이 문장이. 그리고 이것이 버틀러가 두 삶을 구분하는 기준을 '상호주체적 관점에서 사회적 인정과 보호를 받을 수 있는지 여부'로 두고 있음을 설명하는 문장이라고 생각한다.

즉 버틀러의 관심사는 무엇보다 위태로운 삶의 조건을 개선하고 사회적 불평등과 권력의 역학을 변화시키기 위한 저항을 촉구하는 데 있다.

 

보름스는 주체의 생명이 유지되고 발전하려면 의식주 같은 기본적 요건 외에도 돌봄, 관계, 사회적 조건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버틀러는 '돌봄'이라는 단어에 부정적 기색을 내비친다.

내 경우 전반적으로는 버틀러의 의견에 공감하지만 '보름스의 돌봄을 왜 부정적으로 보는가?' 가 궁금했다. 버틀러는 바로 그 이유를 서술하는데 공공재와 공적 의무로 다뤄져야 할 사회복지가 '돌봄'이라는 이름으로 개인- 정확히는 여성의 몫으로 갈 것을 우려한다.

p69 / 신자유주의로 인해 빚어진 제도적 황폐화를 보완해줄, 자선활동의 도덕적 성향과 기독교 정신의 "돌봄"을 함양하라는 요청을 받게 될까봐 우려스럽습니다. 그보다 사회복지 서비스와 공급은 정부가 명예롭게 생각해야 할 공공재와 공적 의무로서 다루어 져야 하는 게 맞습니다. 항상 그런 식으로 작동하는 것은 아니지만 특정한 종류의 기독교적 가치가 격상되는 것은 좀 걱정이 됩니다. 이런 기독교적 가치는 경제적 황폐화와 궁핍을 보상하기 위해서 매우 전통적인 가족 개념과 여성의 돌봄노동 개념을 강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당연히 저는 돌봄이 그런 식으로 작동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둘은 확실히 토론이 되는 사람이다. 보름스도 바로 돌봄에 취약성이 있음을 인정한다.

p72 / 저는 돌봄을 이상화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돌봄을 비판적으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이것이 제가 비판적 생기론뿐 아니라 비판적 휴머니즘까지도 옹호하는 이유입니다. 양가성과 양극성은 어디에나 있고, 그 때문에 어디에서든 비판이 필요합니다.
p76 / 취약성의 장면은 가장 위험한 장면이며 우리가 다시 논의를 시작할 출발점이 되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2018년의 논의가 끝나고 다음 논의가 있을 것이라는 뉘앙스를 풍긴다.

 

주요 내용이 아니라 지나갔지만 p63에 프리모 레비 언급이 나온다. 이 사람, 어디서 분명히 들었는데.. 하고 생각해보니 서경석 님의 책에서였던 듯하다. 언젠가 프리모 레비의 책도 읽어보고 싶다. (아니 아직 사놓고 못읽은 책이 산더미인데)

 

 

후기

제목은 "후기"이지만 사실은 2022년의 대담을 여기서 다룬다.

이는 돌봄의 중요성을 더 구체적으로 논하는 내용으로 둘의 의견이 대체로 일치하는 방향성으로 간다. 돌봄은 단순 생명 유지의 조건이 아닌 삶의 존엄성을 보장하는 중요한 도구가 된다는 것을 전제한다.

 

보름스는 글로벌이라는 개념이 최소치라는 개념과 연결되어 있고 그 최소치는 살 만한 삶을 위한 최소한의 개념이라 한다. 그리고 버틀러는 그 최소치를 글로벌 수준에서 달성하기 너무 어렵다고 하고, 둘은 "모든 종류의 삶에 대해 최소한의 살 만한 삶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한다. 이는 '우리 삶의 모든 차원에서 최소한의 인정을 받아야 함'을 뜻한다. (p107-109)

p111 / (버틀러) 살 만한 삶은 더 많은 모든 것의 전제 조건이잖아요, 그렇죠?
적어도 살 만함의 조건이 어느 정도 갖춰지지 않으면 아무도 행복해지지 못한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p117 / (보름스) 취약성으로부터 자신을 보존하고 싶을 때, 한 인구 집단 안에 하나 혹은 여러 경계선을 만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팬데믹 상황 중 미국에서 마스크를 쓰지 않고 방역 수칙을 따르지 않을 '자유'를 주장한 사람들을 향해 둘은 강력한 비판을 가한다.

버틀러는 "내가 원한다면 죽게 내버려둬" 라지만 그로인해 다른 사람 또한 죽게 내버려둘 수 있음을 지적하며 그런 사람들은 죽음 충동에 휘말려 삶의 이름으로 위해를 가하고 있다고 말한다.

보름스는 피할 수도 있었을 죽음이 일어나도록 허용하는 순간, 그것은 삶의 의미에 전반적으로 모순이 되며 그것이 일반적인 배신과도 같은 것이라고 의견을 표한다. (p122-128)

 

이어 보름스는 삶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 책임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고 버틀러는 동의하며 삶은 소유와 재산을 넘어서는 것이라 말한다. 모든 이들의 삶은 결국 연결되어 있으며 살만한 삶을 위해 죽음의 힘에 반대해야 한다고 말하며 맺는다.

 

모두에게 '살 만한' 삶의 조건을 확보하라

 

인간에게 살 만한 삶을 보장하는 것은 단순히 정치적, 사회적 목표가 아니라 인간의 상호의존성에서 비롯된 윤리적 의무이자 책임이라는 것이 버틀러와 보름스의 공통된 주장이다.

이것을 이룰 수 있는 것은 "진정한 민주주의"라고 이들은 말한다. 진정한 민주주의가 모든 사람에게 ' 만한' 삶의 조건을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인간의 기본적인 생명과 존엄성을 지키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본다.

 

나는 둘의 의견에 공감하는 한편 수많은 삶들이 살 만하지 않고서는 나의 삶도 살 만하지 않다고 말한 버틀러의 메시지가 내내 묵직하게 남는다. 나치가 그들을 덮쳤을 때라는 시가 떠오르며, '그저 남의 일'로 묵과해서는 안된다는 책임감이 느껴졌다. 둘의 의견대로라면 - 다소 이기적이지만 - 결국 나의 삶이 살 만하게 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