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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독다독 2024

27. 푸른 들판을 걷다 - 클레어 키건

by 김연큰 2025. 2. 17.

2024년 8월에 읽은 네 번째 책. 예전에 <맡겨진 소녀 - 클레어 키건>를 보고 반해서 출간되면 족족 구매해서 읽고 있다. 이 책이 2024년 8월 21일 출간이니 출간되자마자 읽은 셈이나 다름 없다. 내 인생에 이런 책이 있었나 싶다.

 

이 책은 키건의 단편 소설 모음집이다. 그런데 전작들과 좀 다른 느낌이다.

전작들은 따스하고 먹먹한 감동이 있었다면 이건 약간 가벼운 비행운 느낌?

특히 첫 작품인 <작별 선물> 때문에 더욱 비행운이 떠올랐다.

비극적인 이야기가 주류이고 그래서 색채로 따지면 몹시 찌푸린 날의 구름 같은 음울한 회색빛이다.

비행운 - 김애란

 

비행운 - 김애란

2024년 7월에 읽은 일곱 번째 책. '비행운'은 새로운 삶을 동경하는 형식으로(飛行雲), 하지만 현실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연쇄적 불운(非幸運)에 발목 잡힌 '우리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책

kim-lotus-root.tistory.com

 

하지만 키건 작품의 특징은 일관되게 적용된다.

내가 느끼는 키건 작품의 특징이자 매력은 자연, 풍경 등의 묘사는 세밀한데 서사, 그니까 사람 간의 이야기는 세밀하지 않다는 거다.

크로키 같다고 해야하나? 아니면 윤곽선을 따놓은 느낌?

상상의 여지가 많고 그래서 이야기가 약하다고 느끼거나 어렵게 느껴질 수 있다.

<맡겨진 소녀> 초반부를 읽을 때 그런 느낌을 강하게 받았고 그래서 책이 얇은데도 읽는 속도가 나지 않았었다.

그렇지만 그 서사를 만들어가는 힘이 복선이라고 생각한다. 초중반에 어떤 예리한 문장이 나오면 그 문장은 후반에 실현된다. 꿈도 복선 역할을 한다.

 

개인적으론 <삼림 관리인의 딸>이 가장 흡입력있고 재밌었다. 여기 있는 작품 중 가장 긴데 그래서 오히려 더 읽기 쉬웠던 거 같다. 전개가 대충 예상이 되기도 했지만 그런 건 <이처럼 사소한 것들 - 클레어 키건>에서도 느꼈기에 문제가 되진 않았다.

사랑하지 않은 남자와 결혼한 여자의 외로움이 절절히 느껴져서 그녀의 부정이 큰 흠으로 보이지 않는 희안한 상황이라고나 할까.

 

<검은 말>의 주인공과 <삼림 관리인의 딸>의 주인공 빅터를 보면 뭐랄까 <운수 좋은 날> 보는 듯도. 사랑과 애정은 역시 표현해야 하는 것 아니겠나.

<퀴큰 나무 숲의 밤>은 몽환적이고 신비로운 분위기? 이긴 한데 뭔가 스릴러 같은 느낌도 들었다.

 


 

한편 이 책에 실린 작품들은 공통적으로 남자가 악하거나 약하다. 대체로 비겁하고, 믿음직한 남자가 없다.

하지만 남자에게 당하는 여자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 가끔 잠자리 씬이 있지만 여자가 주도적이고 남자는 임신을 위한 이용 대상? 이런 느낌이 강하다. 그리고 그 결과물에는 아버지의 흔적이 없다. (예: 삼림 관리인의 딸, 퀴큰 나무 숲의 밤)

그나마 예외적인 게 <푸른 들판을 걷다> 속 사제인 듯 하다. 과거는 비겁하고 약했는데, 결말 부분에 가서는 과거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신의 의문을 풀고 해소하는 느낌.

 

옮긴이의 말을 보면 "가부장적인 아일랜드 사회의 이기적이고 때로는 폭력적인 아버지와 남자들에 대한 이야기" 라고 적혀있다. "현실적인 아일랜드의 아버지 상을 통렬하게 보여준다"고 하는데 아일랜드 사회가 이런 것인가…ㅠ 반대로 <맡겨진 소녀>는 전형적인 아일랜드의 아버지와는 다른 아버지 상을 그리고 싶었다고 하는데.

이걸 읽고 궁금해서 좀 검색해보니, 아이리쉬 남자 = 안좋은 한국남의 서양 버전이라는 말이 있다......

 


 

몇 군데 인상적인 부분 - 핵심 내용과는 상관없더라도 나에게 인상적인 문구들을 옮겨본다.

 

작별 선물

바람이 강할수록 나무도 강해진다.

 

푸른 들판을 걷다

“얼룩에 대해서 잘 아네요.” 던 양이 말한다. “정작 당신 파자마는 누이 다섯 명이 주름 하나 없이 다려주지만 말이에요.”

세상에서 두 사람이 같은 순간에 같은 것을 바라는 일은 거의 없다. 때로는 바로 그 점이 인간으로서 가장 힘든 부분이다.

 

검은 말

"우리가 죽어 없어진 뒤에도 땅은 그대로 남아 있을 거야. 우리야 땅을 빌려 쓰는 것밖에 더 돼?"

 

삼림 관리인의 딸

1년이 지나기도 전에 그녀는 결혼 생활의 공허함을 쓰라리게 느꼈다. 침대를 정리하는 공허함, 커튼을 치고 여는 공허함. 이제 마사는 결혼하기 전 그 어느 때보다도 외로웠다.

가끔 그는 그녀를 멀리 데리고 가서 마음을 전부 털어놓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다.

언젠가는 다 끝난다. 토지 문서를 돌려받으면 철제 상자를 사서 오크 나무 밑에 묻을 생각이다. 아하울에 대한 걱정이 사라지면 그의 미래는 풍족할 것이다.

 

물가 가까이

이제 그도 할 말이 있다. 그가 대꾸할 말을 생각하고, 말하겠다고 결심하고, 그러다가 어머니를 보고 주저한다. 어머니의 눈빛이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간청한다.

청년은 눈을 감지만, 곧바로 자신이 무엇을 빌어야 할지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오늘 하루 중에서 가장 불행한 순간이지만 그는 입김을 세게 불어 촛불을 끈다.

 

굴복

그는 자신이 옳았다는 사실에 위안을 느꼈지만 내심 틀리기를 바랐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희망은 언제나 마지막에 죽는다.

 

퀴큰 나무 숲의 밤

마거릿은 바닥에 누워 있다가 짭짤한 맛이 나서 그제야 자신이 울고 있음을 깨달았다.

내돈내산이자 내가 쓴 독후감/서평 27편 : 푸른 들판을 걷다 (클레어 키건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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