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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독다독 2024

26. 나는 왜 쓰는가 - 조지 오웰

by 김연큰 2025. 2. 17.

2024년 8월에 읽은 세 번째 책.

소설 <동물 농장> 및 <1984>로 유명한 조지 오웰의 에세이인데 이걸 왜 알게 됐드라…? <책 한번 써봅시다 - 장강명>에서 언급되었던 거 같기도 하고…

 

이 책은 조지 오웰의 에세이 중 역자가 29편을 꼽아 시간 순으로 배치한 건데, 언뜻 책을 펼쳐보고 빽빽한 텍스트와 다른 책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은 사이즈의 폰트, 좁은 자간에 '헉' 소리가 절로 나왔다.

하지만 역시 조지 오웰! 그가 쓴 글답게 잘 읽혔다. 물론 역자가 번역을 잘한 덕도 있으리라.

 

에세이를 시간 순으로 배치한 덕에 저자의 자서전을 보는 느낌도 들었다.

경찰, 노숙 체험, PD, 편집자 등 저자가 이렇게나 다양한 직업을 경험한 걸 처음 알았고,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 것도 이 책을 통해 알게 됐다.

그가 겪고 느끼고 생각한 것들을 읽고 있자니 '아 이 사람의 동물농장과 1984가 괜히 나온 게 아니구나, 다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창조된 역작이구나' 생각이 들었다.

 

한편 저자에 대한 존경심이 새삼 차올랐다. 이러한 경험을 한다고 다 이런 통찰력과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을 갖게 되는 건 아닐테니까.

<1984>의 바탕이 된 듯한 <당신과 원자탄> 및 <과학이란 무엇인가?>와 책보다는 영상, 그것도 앞뒤 맥락 없어 생각을 소멸시키는 숏츠의 시대를 예견한 듯한 <문학 예방> 등 책 말미로 갈수록 그 예리함에 놀라웠다.

 

이 책을 보면서 나는 더욱 내가 몸담은 업계의 민낯을 까발리는 글을 쓰고 싶어졌다. 이튼 스쿨을 졸업하고 버마로 자진하여 경찰로 가서 조국과 제국주의에 대한 혐오가 생겼듯 나도 업계에 그런 심정이다보니.

 

특히 <코끼리를 쏘다> 및 <정말, 정말 좋았지>를 보고 더 그러했다. 전자의 경우 업계를 보는 내 마음과 당시 오웰의 심정이 비슷하고, 하지만 정작 할 수 있는 것 없이 다른 이에게 떠밀려 행동하는 현실도 비슷했다. 후자의 경우 요약하자면 내가 모 회사에서 겪은 일과 비슷하고 그래서인지 당시 감정과도 비슷한 면이 많고 심지어 제목에서 풍기는 뉘앙스조차 내가 그 회사에 대해 표현하는 말과 비슷하다! (나는 그 회사를 'OO 좋은 회사'라고 표현하곤 한다. OO에 대한 상상은 각자에게 맡긴다.)

 

일러두기에 나오듯, 시작되는 페이지 아래에 그 글이 쓰여진 시기와 당시 오웰의 근황을 덧붙여놨는데 이건 글을 읽기 전에도 유용하지만 후에도 유용했다

해당 에세이의 배경을 알 수 있어 글에 더욱 생동감을 부여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부분 편집이 신의 한 수 느낌.

 


 

아래는 각 에세이에 대해 내가 인상깊게 읽은 부분과 그에 대한 내 생각을 적었다. 내용이 길어지고 관심 없는 사람도 있을 것 같아 접어두었지만 딱 하나만 여기에 꺼내둔다.

 

나 좋을 대로 As I Please

오웰은 BBC 프로듀서 생활을 접고 주간지 <트리뷴> 문예 부문 편집장으로 1년 남짓 일하며 분량과 주제에 구애받지 않고 그야 말로 자기 “좋을 대로" 칼럼을 쓰는데 이 블로그 제목을 짓는데 영감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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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크

그가 동료 부랑자들과 자신을 용케도 분리시키는 게 흥미로웠다. 그는 6개월 동안 떠돌이 생활을 했지만, 하느님 보시기에 자신은 부랑자가 아니라고 넌지시 말하는 것 같았다. 그의 몸은 스파이크에 있을지 몰라도 정신만은 멀리까지 날아올라 중산층의 순전한 정기 속에 있는 셈이었다.

종부세를 낼 만한 가격의 집을 보유한 게 아닌데도 불구하고 종부세 반대하는 사람을 보는 게 딱 이런 기분 아닐지

 

서점의 추억

내가 서점 일을 평생 하고 싶지는 않은 진짜 이유는 그 일을 하는 동안 내가 책에 대한 애정을 잃었기 때문이다. 

내가 오랜 기간 있었던 업계를 떠나기로 결심한 이유도 그 일을 하는 동안 내가 그 업계에 대한 애정을 잃었기 때문이다.

 

스페인의 비밀을 누설한다

'자유주의적' 부르주아는 보다 현대적인 형태의 파시즘에는 전혀 반대하지 않지만 적어도 파시즘이라 불리는 것은 증오한다. '자유주의적' 부르주아는 자신의 이해관계가 막히는 지점까지만 진정으로 자유주의적이다. 그들은 "능력에 따른 지위" 란 말이 뜻하는 정도의 진보를 지지하는 것이다.

자꾸 '자유'를 언급하는 사람을 조심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이 대목을 보며 그 말이 떠올랐다.

 

좌든 우든 나의 조국

일반적인 믿음과는 반대로, 과거는 현재보다 특별히 대단한 게 아니다. 과거가 더 극적으로 보일 수 있는 건, 여러 해에 걸쳐 따로 일어난 일들이 돌이켜 볼 때 하나로 압축되며, 우리의 기억 중에 원래 그대로의 진정한 모습으로 다가오는 것은 극소수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기억은 왜곡되기 마련이고 그래서 미화되기 쉬운데 그걸 깔끔하게 정리하여 보여준 느낌.

 

영국, 당신의 영국

상당히 고루한 빅토리아 시대의 집안을 닮았다고 할 수 있다. 골칫덩이가 많진 않아도 찬장마다 해골이 넘쳐나는 집안 말이다.
이 집안에는 비굴하게 아첨을 떨어야 하는 부자 친척도, 끔찍이 들러붙는 가난뱅이 친척도 있으며, 집안의 수입원에 대해 함구한다는 단단한 공모가 있다. 또 젊은 사람들은 대체로 좌절을 겪고, 실권은 대부분 무책임한 삼촌들이나 몸져누운 숙모들 손에 있다.
그래도, 집안은 집안이다. 나름의 언어가 있고, 공통의 기억이 있으며, 적이 다가오면 단결한다. 엉뚱한 식구들이 살림을 주무르는 집안- 영국을 한마디로 표현한 다면 그게 가장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영국을 표현한 내용이지만 지금의 우리나라가 딱 저 모습인 듯 한데...

 

스페인내전을 돌이켜본다

당시에도 그랬고, 그 이후로도 줄곧 인상적이었던 것은, 잔학행위를 믿고 안 믿고 하는 것이 순전히 정치적인 편향에 따라 좌우된다는 사실이다. 모두가 증거 조사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적의 잔학행위는 믿으면서 자기편의 것은 믿지 않는 것이다. (…) 게다가 더 이상한 건, 정치적 풍경이 바뀌기만 하면 상황이 언제든 갑자기 역전될 수 있으며 어제 확실한 사실로 입증된 만행이 오늘은 터무니없는 거짓말이 되어버릴 수 있다는 점이었다.

이 책은 2024년 8월에 읽은 건데 지금 시점에서 이 부분을 다시 보니 왜 2024년 12월 사건을 보는 느낌일까? 스페인내전은 우리나라 군사정권 시절과 비슷하다는 말을 많이 듣지만 지금 시점도 크게 다른 거 같지 않다.

"이쪽도 저쪽도 나쁘다. 나는 중립이다." 하지만 실제 상황에서 사람은 중립일 수 없으며, 누가 이기든 상관없는 전쟁 같은 건 없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거의 항상 한쪽은 다소 진보적인 쪽에 서고, 다른 쪽은 다소 반동적인 쪽에 서는 법이다.

중립 기어란 없다는 말을 먼저 하신 분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과 원자탄

세계 전반이 돌아가는 모양을 보면, 수십 년 동안의 흐름은 무질서가 아니라 노예제가 부활되는 쪽으로 가고 있다. 우리는 전반적인 와해가 아니라 고대 노예제국처럼 끔찍하게 안정된 시대로 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웰이 미래를 보는 능력이 너무도 정확하여 놀랍다. 이런 시각은 어떻게 가질 수 있으며 어떻게 예측할 수 있는 것인가? 이 에세이는 마치 1984의 전주곡 같은 느낌이다.

 

과학이란 무엇인가?

과학교육은 합리적이고 회의적이며 실험적인 사고의 습성을 심어주는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어떤 '방식' , 즉 부닥치는 어떤 문제에도 적용할 수 있는 방식을 습득하는 것이어야지, 사실을 잔뜩 축적하는 것이기만 해서는 안 된다.

과학은 화학, 물리학 같은 지식 그 자체보다 '생각하는 방법' 즉 '태도적인 면'을 중시해야 한다는 논지의 글로, 지식 그 자체에 몰두했기에 파시즘에 동조한 과학자가 많아졌다는 주장을 한다. 나도 공감하는 바임. 과학 뿐 아니라 모든 학문은 그 학문이 갖고 있는 특유의 사고 방식, 태도를 반드시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함. 즉 what보다는 why, how.

이 에세이 또한 1984의 전주곡 같은 느낌이었다.

 

문학 예방

전체주의에 의한 타락이 꼭 전체주의 국가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어떤 생각이 유행하는 것만으로도 일종의 독이 퍼질 수 있으며, 그 때문에 문학적인 목적으로 쓸 수 없는 주제들이 잇따라 생겨나게 되는 까닭이다. 강요된 통념이 있으면 (흔히 그러하듯 두 가지 통념이 있어도) 어디서든 좋은 글은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이 글은 지적 자유에 대한 이야기지만, 손가락을 검열하는 말도 안되는 요즘 시대상에 비추어봐도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산업화된 나라의 다수 대중이 신문 외에 어떤 유의 읽을거리를 필요로 할지는 지금도 의문스럽다. 아무튼 그들은 읽을거리에 대해선 몇몇 다른 취미에 드는 만큼의 돈을 쓸 의향이 조금도 없다. 아마 소설은 장• 단편을 막론하고 영화와 라디오 프로그램에 완전히 자리를 내주고 말 것이다. 아니면 인간의 자주성을 극도로 축소시키는 컨베이어 벨트식 제작 과정을 거쳐 생산되는, 모종의 저급하고 자극적인 소설이 살아남을지도 모른다.

숏츠 열풍에 대해 예견한 듯한 시각이라 놀라웠음.

 

가난한 자들은 어떻게 죽는가

사람은 물론 살고 싶어 하며, 죽음에 대한 두려움 덕분에 계속 살아가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때 이후로 나는 험하게, 그리고 너무 늙지 않았을 때 죽는 게 낫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도 같은 생각이며 사노 요코의 에세이가 떠오르기도 했다: 사는 게 뭐라고 - 사노 요코 및 죽는 게 뭐라고 - 사노 요코

 

정말, 정말 좋았지

자전적 에세이고 소설 같은 느낌이며, 명예훼손 우려가 있어 타겟이 된 인물 사후에야 영국에 출판되었다는 소개에 관심있게 읽었다.

사실 개인적으로 메모한 내용은 아래 열거한 것보다 더 많은데, 핵심적인 것만 옮겨본다.

그때도 나는 아파서 운 게 아니었다. (…) 내가 운 건 그게 상대가 기대하는 바라는 느낌이 들어서이기도 했고 정말 뉘우치는 마음이 있어서이기도 했는데, 그게 다는 아니었다. 어린 시절에만 느끼는 것이라 전달하기 쉽지 않은, 보다 깊은 슬픔이 있었던 것이다. 그건 적대적인 세상에 갇혀버렸다는, 지배가 너무 완강해서 나로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는 선악의 세상에 감금돼버렸다는 처량한 고독감과 무력감이었다.

내가 모 회사에서 어떤 인물 때문에 무력감을 느꼈을 때의 상황과 감정이 너무도 이 구절과 비슷하다 - "지배가 너무 완강해서 나로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는 선악의 세상에 감금돼버렸다는 처량한 고독감과 무력감"

그리고 그렇게 생긴 트라우마는 단기간에 치료가 불가하며, 이런 식으로 상처받은 사람이 수 년 간 길게는 수십 년 간 치유되지 못하는 이유를 나도 겪고보니 알 거 같다.

아이들은 균형 또는 그럴듯함에 대한 감각이 둔하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아이는 자기중심주의와 반항심으로 똘똘 뭉친 존재인지 모르나, 자기 판단을 확신하게 해줄 만한 경험이 축적되어 있지 않다.

오웰은 이때가 어릴 때니까 이럴 수 있다 쳐도 나는 왜 그랬을까? 왜 그런 가스라이팅을 당했을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

스스로 생각한 이유는 저런 사람을 만나보지 않아서 사회에 저런 사람이 있을 거라 상상해본 적도 없고, 그래서 더 대응을 못한 거 아닐까 생각을 했다. 오웰도 경험을 말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매력 없는 소년이었다. 설령 그 전에는 아니었다 하더라도 세인트 시프리언스는 금세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

그 회사도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 그 전에는 아니었는데.

내돈내산이자 내가 쓴 독후감/서평 26편 : 나는 왜 쓰는가 (조지 오웰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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