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다독다독 2024

40. 왜 읽을 수 없는가 - 지비원

by 김연큰 2025. 2. 24.

2024년 12월에 읽은 책이다. 제목을 보면 난독증을 다루는 건가? 싶을 수 있는데 사실은 쓰는 사람에게 문제제기를 하는 책이다. 잘 못쓰니까 잘 못읽는 거라고 하는 책.

 

"들어가며"에서 편집자로서 전문지식인과 일반인의 간극을 메꾸는, 그렇게 해서 전문지식에 조금 더 쉽게 입문시키게 하고 싶어했던 본인의 경험담을 얘기하며 "어떤 '글'에 대한 사회적 책임이 일차적으로 글쓴이와 그 글을 편집하는 사람에게 있다고 믿는다. 그 때문에 나는 '안 읽는' 독자들을 먼저 탓하고 싶지는 않다. 그 대신 글쓰기가 직업인 사람들, 자신이 쓴 글에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들의 문장을 한번 돌아보고 싶다." 라고 한다.

 

유시민과 알랭 드 보통의 글을 보며 쉬운 글이 좋은 글이라는 걸 이미 몸소 느꼈고, 어떻게 쉽게 쓸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입장에서 궁금한 책이었다.

 


 

1장에서는 대중매체에 실리지만 전혀 대중적이지 않은, 신문의 칼럼을 주로 비판한다. 신문의 독자는 대중이고 칼럼을 쓰는 이는 독자가 누구인지 알면서 독자에 대한 고려가 없다는 것. 예시로 세 가지 칼럼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진중권의 칼럼이었다. 저자는 아주 후드러지게 패는데 덕분에 내가 진중권 칼럼이 잘 안읽힌다고 생각한 게 내가 바보라서가 아니었구니 하는 위안을 얻었다.

p64 / 매체의 열혈 독자/시청자만을 고려하는 듯한 뉴스가 나오는 것이 우려스러운 뿐이다. 이 우려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면 '내 울타리' 밖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어떤 식으로 말을 걸고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고 싶다.

 

 

2장은 1장의 연장선으로 인문학도 칼럼과 비슷한 이유로 독자 상정을 제대로 하지 않고 '이 정도는 알겠지' 라는 안일한 가정으로 읽기 어려운 글이 양상된다고 말한다. 특히 인문학 저자들에 대해 뼈아픈 일침을 날린다.

p99 / 변화하는 시대, 사회, 언어와 동시대적으로 호흡하지 못하는 완고한 상태. '이 정도는 알고 있겠지'라는 안일한 전제. 배경지식을 공유한다고 생각한 '우리'를 대상으로 삼지만 정작 정체를 알 수 없는 '우리'. 공부가 직업이 아닌 사람들에게 생소한 개념을 필자 스스로도 소화하지 못하면서 문장 안에 그대로 가져오는 글쓰기 습관. 이것이 내가 그동안 부족하나마 여러 인문교양서를 읽으면서, 또는 읽으려고 애쓰면서 생각하게 된, '인문학이 사람들에게서 점점 멀어지는 이유'다.

 

내용은 이렇게 요약이 가능한 한편, 이 장에서 세 가지 주목할 점이 있었는데

 

  1. '신서'에 대해 알게 된 점. 일본이 입문서를 쉽고 이해하기 쉽게 잘 만들고 이건 IT 계열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입문서가 일본서적을 번역한 경우가 많은데 보면서 왜 우리나라는 이런 책을 못만드나 생각을 했었다. 그 답변을 여기서 얻은 느낌이었다. 일본과 달리 '학술서 독자와 일반 독자를 이어준다'는 목적 의식 자체가 없던 것 아닐까. 그나마 IT 책은 이런 책이 최근 몇 년간은 늘어나긴 했다.
  2. 학술과 교양 사이에서 쓰여진 그렇지만 읽기 어려운 네 개의 예시를 드는데 두 번째가 없다..? 두 번째 예시는 보이지 않고 (1, 3, 4는 있지만 2는 없다) 나는 존재를 알 수 없는 2번 글에 대한 비판만 보이는데 왜 이런 책에서 이런 퇴고 실수를 했는지..? 안타깝다고 느꼈다.
  3. <단속사회 - 엄기호> 저자인 엄기호 씨의 예시가 3, 4로 나온다. (3번 글이 익숙해서 출처를 봤다가 엄기호 씨의 글임을 알게 됨) 나도 이 책을 읽으며 전반적인 내용엔 공감했지만 뭔가 좀.. 애매하다?? 느낌을 받았는데 그 이유를 이 부분을 통해 해소할 수 있었다. 나는 잘 모르는 부분은 문맥상 이해하고 넘어가는 편이지만 그렇다고 그런 식으로 넘어가는 게 많아지는 것은 당연히 좋은 경험이 아니다.

 

3장은 우리나라에 만연한 일본에서 들어온 단어들에 대한 이야기다. 일본에서는 나름의 이유를 갖고 외래어를 한자어로 만들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그 이유를 모른 채 그대로 그 단어를 쓰다보니 이게 왜 이 단어야? 가 되는 것. (예: economy가 왜 경제인가?)

 

생각해보면 전공서적을 읽을 때 그랬다. 생활에서 많이 쓰는 단어들이야 이미 뜻을 알고 익숙하니 이게 일본식 단어를 그대로 한국어로 쓰건 말건 별 상관 없었지만 전공은 달랐다. 생활에서 잘 쓰이지 않는 말이 많다보니 내가 영어를 잘 못하는데도 오히려 원서로 읽는 게 더 이해가 빠른 경우가 많았다.

 

3장 막판에 나온 중역(원어 > 번역가가 익숙한 언어 > 독자의 언어 순 번역)에 대한 이야기를 보니 더욱 착잡하다. 우리는 원어를 한국어로 번역한다 하지만 실제론 중역이 되는 경우가 많을 거다. 대표적인 게 내가 읽었던 전공 서적일 것이고..

 

 

4장에서는 지금까지와 달리 본인이 쉽게 읽을 수 있던 글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일본어를 번역하는 입장이라 일본서를 예시로 든다고 했지만 위에도 썼다시피 일본이 입문서를 잘 쓰는 건 사실이다(먼산).

3장을 읽을 당시 내용이 왠지 다음을 위한 밑밥 같다고 생각는데 역시나 그랬다. 단어의 문제가 글을 읽기 어렵게 만드는 원인 중 하나일 수 있다고 말한다.

p142 / 입문서라면 책을 읽고자 하는 사람의 마음가짐도 중요하지만, 책이 그 사람을 이해하는 측면이 있어야 한다. (…) 당신이 모른다면 왜 모르는지, 그 이유를 필자 자신도 포함하는 ‘보편적 경험’에서 찾으면서 짚어줄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p152 / 안다고 생각하는 걸 다른 사람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라거나, 어린아이나 중· 고등학생을 위해 설명하라는 요구를 받았을 때, 자신의 ‘앎’이 얼마나 모호한지 깨달을 때가 있다.

 

이 부분이 참 공감갔다. 내 업무 중 일부는 기술을 제3자에게 설명하는 것이다보니 이 눈높이에서 설명해야 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144 페이지에 있는 "'고등학생도 읽을 수 있다'는 말은 '나는 고등학생들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다'는 말과 동의어다." 라는 문장에 매우 동의한다. 설명할 사람의 지식 수준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명확하고 쉬운 설명이 가능하다는 걸 몸소 체험했기에.

 


 

결국 이 책의 내용을 요약하면 간단하다.

독자 정의를 명확히 하고 그 독자의 지식수준에 맞춰서 쉽게 써야 한다는 것.

'독자가 이 정도는 알겠지' 라는 생각이 읽을 수 없는 글을 만드는 주 원흉이 된다는 것도 경고한다.

 

다른 작법서에도 충분히 나오는 내용이고 1-3장이 전반적으로 화가 가득한 느낌이라 불편한 느낌도 있어서 한 번만 읽는 걸로 충분한 거 같다.

주제는 좋은데 주제 전개를 하는 있어 아쉬움이 있는 책이란 생각이 들었다.

내돈내산이자 내가 쓴 독후감/서평 40편 : 왜 읽을 수 없는가 (지비원 저)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