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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독다독 2025

88. 페스트 - 알베르 카뮈

by 김연큰 2025. 11. 14.

최근 계속 비문학 책을 읽었는데 읽은 책이 모두 실망스럽기도 했고(정확히는 나와 맞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엔 문학을 특히 고전을 읽어보자 생각했다.

 

2020년 팬데믹 시절 다시 크게 유행했던 이 소설을 택한 이유는 앞으로도 감염병이 수시로 언제 갑자기 창궐할지 모른다는 얘기를 얼마 전에 들어서였다. 독감이 내년에 유독 유행할 수 있다는 예측도 나오고...

그래서 책장에서 잠자고 있던 책을 꺼내보았다.

 


 

난 해외 문학을 읽을 땐 등장인물 이름 기억에 애를 먹어서 적어두고 시작했다. (책 뒤표지 참고함)

 

페스트에 맞서 싸우고자 노력하는 사람들

- 리유: 의사. 본인 직업의 사명을 다하려 한다.

- 타루: 페스트 발병 몇 주 전 오랑에 온 미지의 인물. 주변을 관찰하고 기록한다. 부당한 죽음을 거부하려 한다.

- 그랑: 시청 직원이자 코타르의 이웃 주민. 그의 자살 시도를 보고 구해줌.

- 랑베르: 신문기자. 우연히 오랑에 체류 중 페스트 발발로 발 묶임. 행복을 갈구하며 가장 긍정적 인물.

 

페스트를 회피하거나 수용하는 사람들

- 리샤르: 오랑 시 의사회 회장.

- 파늘루: 신부. 신이 내린 형벌이라고 보고 신의 뜻에 따르고자 설교

- 코타르: 가장 부정적인 인물. 모두가 고통에 빠진 상황에서 오히려 세상에 소속감을 느낌

 

나 같은 사람은 이러면 한결 책을 읽기 쉬워진다. 예전에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에서는 아예 인물 관계도를 그리기도 했다. ㅎㅎ

 


 

본 감상에서는 파늘루 신부와 오통 판사 및 그 가족에 대한 이야기는 의도적으로 배제했습니다.

 

이야기의 무대인 오랑에 대한 소개로 시작. 이야기 자체는 '연대기'라고 표현한다.

 

이 책은 총 5부로 나뉘어 있으며 내용과 전개의 심각도에 비해 서술 방식이 꽤 담담한 편이다. 아마 화자가 '서술자'라서 관찰기인양 서술해서 그런가 싶기도 하다. 그럼에도 페스트 환자에 대한 묘사를 보면 독자 입장에서 보면 몸서리치는 끔찍함이 느껴지니 페스트에 대한 고통이 얼마나 심각한 것일지.

 

1부는 초반부터 언급된 도시와 각 인물들의 평범한 일상을 서술하고 마치 조금 수그러든 듯한 뉘앙스를 풍기지만 곧 심각해진다. 그리하여 공식적으로 페스트 사태를 선언하고 도시를 폐쇄하라는 전보로 끝난다. 평범한 일상과 대비되어 더욱 극적인 느낌이었다.

 

여기서 가장 주목할 부분은 십 페이지 남짓 동안 쥐의 등장과 죽음을 표현한 부분, 그리고 리유와 리샤르의 충돌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리유의 생각에서 이 부분이 무척 멋있었는데

마땅히 해야 할 일은, 인정해야 할 것이면 명백하게 인정해, 드디어 쓸데없는 두려움의 그림자를 쫓아 버린 다음 적절한 대책을 세우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페스트가 멎을 것이다.

 

페스트를 인정하느냐 마느냐의 갈림길에서 리샤르와 리유의 충돌은 둘의 성격을 드러내는 부분이었다. 병명이 무엇인가가 중요한 아니라 빠른 대응이 중요하다(실리적 관점, 인본주의, 휴머니즘?) 리유 vs 페스트라고 단언할 확증이 부족하니 이렇게 명명하기 어렵다고 망설이는(절차에 충실, 권한만큼만 행동, 보수주의) 리샤르. 그래도 사람을 살려야 한다는 의사의 사명에는 다들 동의하는구나 싶었다. 하지만 '특수 시설을 갖춘 병실'이란 결국 가망 없는 환자들을 방치하는 것에 가깝다는 현실은 깝깝했고(리유도 그렇게 생각했을 듯하다) 그렇게 투명하지 못하고 속이기 바쁘다보니 '의사들의 실험 재료가 되기는 싫어요'라는 말이 나오는 것일 게다.

 

2부는 폐쇄된 오랑 시를 묘사한다. 그 안에 사는 사람들(원래 살던 사람들이든, 잠시 머물다가 발이 묶인 사람들이든)의 일상은 마치 귀양살이 같은 모습이다. 급작스레 가족과 단절되고 편지를 쓸 수도 없다. 한편 곁에 있는 가족들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기도 한다. 삶과 일상의 소중함도 깨달은 듯 보인다. 그리고 각자는 고독해진다.

 

숨고르기마냥 재밌는 대목도 있다. 신기할 정도로 사람들이 리유에게 자기 속내를 털어놓는다. 그랑도 그렇고 랑베르도 그렇다. 랑베르는 자기 편의를 위해 털어놓은 측면이 있다지만 그랑은 왜였을까?

 

한편 여기 언급된 병원의 모습을 보며 느낀 건데 이 책에서 묘사한 오랑 시의 상황은 코로나19 팬데믹 때의 도시의 상황보다는 오히려 5.18민주화운동 때의 광주에 가깝다 생각이 들었다.

부득이 어떤 학교의 실내 체육관까지 이용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지금 그 속에 갖추어 놓은 모두 오백 개나 되는 침대는 거의 전부가 환자로 차 있었다.

 

자꾸 <소년이 온다>가 아른거렸다. 특히 병원 묘사 부분은 도청 시신들이 천으로 덮여있던 상황이 떠올랐다. 광주에서는 독재자의 명령을 받은 군대가 페스트였다. 양쪽 계엄령이 내려진 상태이기도 했다. 나중에 3부에 묘사된 장례식의 특색 또한 <소년이 온다>에서 언급된 화장 장면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46. 소년이 온다 - 한강

2025년 1월에야 이 책을 읽었다. 구매한지는 오래된 이 책을 읽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광주민주화운동을 소재로한 걸 익히 알고 있고, 광주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무고하게 죽었는지도

kim-lotus-root.tistory.com

 

다만 오랑의 경우 파늘루의 설교 이후 격리가 길어지며 발생하는 상황들은 코로나19 때와 다름 없었다. 계속된 진료는 얼마나 힘이 것인가. 지쳐가는 리유의 모습은 코로나19 때의 의료진들을 떠올리게 했다. 또한 길어지는 격리로 1 마지막에 언급된 일상이 서서히 무너져가는 것이 보인다.

 

와중 어느 타루가 리유에게 찾아와 자원 보건대를 제안하는데 이때의 대화가 리유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했다. 그의 가치관도 있었고. 이 대화는 이 책에서 가장 주목할 부분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 병으로 해서 겪는 비참과 고통을 볼 때, 체념하고서 페스트를 용인한다는 것은 미친 사람이나 눈먼 사람이나 비겁한 사람의 태도일 수밖에 없습니다.

 

리유는 '성하게 살아남을 확률은 3분의 1밖에 안된다'고 했지만 타루는 '시체를 목욕시키는 사람은 살아남았다'며 뜻을 굽히지 않는다. 그 대사에서 뭔가 타루의 앞날이 보이는 듯한데... 소설에서 자주 보이는 흔한 클리셰?

 

이후 보건대의 이야기는 멋있다. 서술자는 애써 그에 대한 칭송을 억누르지만 그래서 돋보이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2 마지막 부분의 리유의 발언에서 서술자가 보건대를 영웅처럼 묘사하는 꺼려했는지 있었다. 영웅이라서 나선 아니라 인간으로서 성실하게 임하는 임을 강조한다.

이 모든 일은 영웅주의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것은 단지 성실성의 문제입니다. 아마 비웃음을 자아낼 만한 생각일지도 모르나, 페스트와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성실성입니다.

 

3부는 짧다. 목적도 페이지에 기재하고 있다. "더위와 질병이 절정에 달한 이때쯤 전반적인 시각에서, 그리고 예를 들어 가면서,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우리 시민들의 난폭함, 사망자의 매장, 헤어져 지내는 애인들의 고통 같은 것을 묘사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바이다."(p221)라고 말이다. 목적대로 기술하는데 끔찍함이 어찌나 충격적인지 짧은데도 임팩트가 크다. 특히 격리조치로 인한 생이별 이후 감정의 메마름을 표현하는 부분이 끔찍하다 여겼다. 사실 3부가 길면 책을 읽기 매우 고통스러웠을 같다......

절망에 습관이 들어 버린다는 것은 절망 그 자체보다 더 나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4부는 길어진 재앙 탓에 지친 그랑, 리유, 타루 등 등장인물들의 모습과, 그로 인해 방역 규칙을 소홀히하게 되는 모습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이는 등장인물 중 누가 페스트에 걸려도 이상하지 않다는 복선인 듯하다.

 

다만 코타르는 예외다. 고독했던 그는 재앙 덕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수 있으니. 그는 혼자 있는 천국보다 여럿이 함께하는 지옥을 원하는 듯 보이는데 어쩌면 코타르를 통해 저자는 인간은 혼자 살 수 없음을 보여주고 싶은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코타르의 모습을 후여서일까. 연대 책임을 다하겠노라는 랑베르의 고백에 찡한 감동이 느껴졌다. 사실 그의 행보는 진즉 예측 가능했는데도 말이다. 아니, 정확히는 랑베르의 고백 때문이 아니라 '그래도 행복을 찾아야지' 하는 리유와 타루 때문에 더욱 감동적이었다.

 

또한 길게 이어진 페스트라는 재앙은 결국 양극화 문제를 불러온다. 다른 이유로 양극화이긴 하지만, 코로나19 이후 양극화가 심해진 생각하면 역병이라는 재앙은 목숨을 위협하는 아니라 서민들의 (먹고 사는 문제) 위협한다.

 

조금은 뜬금없게도, 아마 서술자가 이야기할 때가 되었다고 여겨서겠지만, 타루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아니 그러니까, 리유에게 그렇게들 자기들 속내를 털어놓는 거야?) 도시와 전염병을 만나기 훨씬 전부터 페스트로 고생했다고 소개한다. 이어 털어놓는 그의 이야기를 좇으며 그가 말하는 페스트는 자체가 아니라 '부당한 죽음' 내지는 '죽음을 부르는 행위/사람' 은유한 것임을 알게 됐다.

나는 다만, 이제 다시는 페스트에 전염되지 않으려면 반드시 해야만 할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그것만이 우리들로 하여금 평화를 되찾을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을, 평화가 아니라면 적어도 떳떳한 죽음을 바랄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인간을 편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며, 비록 인간을 구원해 주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최소한 그들에게 되도록 해를 덜 깨치며, 때로는 약간의 선까지 행하도록 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직접적이건 간접적이건, 좋은 이유에서건 나쁜 이유에서건 사람을 죽게 만들거나 또는 죽게 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모든 걸 거부하기로 결심했습니다.

 

4 막바지에 들어 희망이 없어진 듯한 오랑 시의 모습이 보인다. 2부부터 그런 느낌이 들었지만 이쯤되면 더더욱 전쟁과 비슷해보인다. 하지만 가장 희망이 없어보일 때 반등하기 마련. 곧 죽을 것으로 예상했지만 극적으로 살아나는 사례가 발생하고 쌩쌩한 쥐가 다시 등장하며 회복세로 접어드는가 하는 희망을 암시한다. 사실 흔한 전개일 수도 있으나 소설 뿐 아니라 인간 삶도 - 가장 절망적이고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반등하는 것 같다. 그 반등이 정말로 뛰어오르는 것이냐 아니면 잠시 솟구쳤다 다시 떨어지느냐의 차이는 있지만.

 

드디어 마지막 5부다. 페스트가 물러날 기미를 보이며 서서히 활기를 찾는 오랑 시를 묘사하며 시작한다. 4부의 마지막에 쥐가 나타난 것처럼 5부의 초입에 고양이도 다시 나타난다. 그런데 페스트 덕에 기쁨을 맞았던 코타르는 다시 어두워지고 있다. 그리고 사라진다. 코타르의 상태와 페스트의 양상이 비슷했다는 걸 떠올려보면 이는 아마 페스트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또한 예상대로 타루 페스트에 걸린다. 4 초입에 너무 길어지고 일상이 탓에 가끔 방역이 느슨해졌던 풍경을 묘사한 예상대로 복선이 되었고 여파가 타루에게 갔다. 타루의 투병을 다룬 부분에서 리유와 타루 둘의 우정은 진짜구나, 연대가 강했구나 느껴진 장면이 있다. 하지만 타루가 결국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리유는 무력감을 느끼는데 표현은 나도 참담하게 만들었다. 또한 타루가 숨을 거둔 이후는 침묵의 밤임을 서술하며 패배의 침묵이라 하는데 이 표현은 (4 막바지부터 서서히 페스트는 전쟁이라는 뉘앙스를 주더니) 여기서 대놓고 전쟁임을 보여주는 느낌이 들었다.

 

타루의 죽음은 동이 트기 가장 추운 새벽의 시간이었던 걸까. 오랑 시는 드디어 다시 열리고 랑베르는 그토록 바라던 순간을 맞이한다. 바로 아내와의 재회. 많은 사람들이 그런 환희의 순간을 갖고 시는 다시 북적북적해진다.

 

마지막 장에서 피식 웃고 말았다. 서술자가 누구인지 알게 되어서. 어쩐지, 너무 다들 리유에게만 속내를 척척 털어놓더라니, 리유가 아는 내용만 써야 해서 그랬구나 싶었다. 소설은 전지적 관찰자 시점 같았지만 사실상 1인칭 주인공이자 관찰자 시점이었던 게지.

 

이후 묵직한 메시지를 남기며 소설은 끝을 맺는다.

리유는 그러한 환희가 항상 위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그 기쁨에 들떠 있는 군중이 모르는 사실, 즉 페스트균은 결코 죽거나 소멸하지 않으며, 그 균은 수십 년간 가구나 옷가지들 속에서 잠자고 있을 수 있고, 방이나 지하실이나 트렁크나 손수건이나 낡은 서류 같은 것들 속에서 꾸준히 살아남아 있다가 아마 언젠가는 인간들에게 불행과 교훈을 가져다주기 위해서 또다시 저 쥐들을 흔들어 깨워서 어느 행복한 도시로 그것들을 몰아넣어 거기서 죽게 할 날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위 메시지에 대해, 역사는 반복되므로 잊지 말고 주의가 필요하다 뜻으로 나는 이해했다.

 


 

책을 읽기 전 접했던 '번역 때문에 읽기 불편하다'는 평에는 내 경우는 그렇게 해당되지 않았다. 더한 번역투를 너무 많이 봐온 탓일까? 오히려 그냥 흔히 봤던 해외 소설의 번역본이구나 하는 느낌 외에는 별다른 감정이 없다.

 

팬데믹 때 이 책이 역주행한 게 이해는 되는데, 코로나19 때는 거리두기, 재택근무 등을 했어도 인터넷을 통해 모든 걸 다 할 수 있다보니 이 책에서 표현된 오랑에서의 삶처럼 귀양살이 혹은 감옥살이라는 느낌은 딱히 들지 않았다. 언제든 원할 때 음성이든 화상이든 서로의 안부를 묻고 대화할 수 있었으니 오랑 시와는 많은 것이 달랐다.

 

내 경우는 2장에서도 언급했듯이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같이, 권력에 의해 봉쇄되어 억울한 죽음을 맞이한 사건들이 더 떠오르는 면이 있었고 실제로 2차세계대전이 이 소설을 쓰게 한 원동력이었다고 하니...

카뮈는 페스트라고 칭하긴 했지만, 결국 그 의미는 타루의 표현을 빌려 "직접적이건 간접적이건, 좋은 이유에서건 나쁜 이유에서건 사람을 죽게 만들거나 또는 죽게 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모든" 것이라 생각한다. 전쟁도, 5.18도 여기에 해당된다.

 

팬데믹 때가 아니라, 가자 지구의 전쟁과 우크라이나 전쟁을 보며 책을 건네는 적합할 것으로 보인다.

내돈내산이자 내가 쓴 독후감/서평/책 리뷰 88편 : 페스트 (알베르 카뮈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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