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번에 올린 <돈의 얼굴>과 함께 산 책이다. 정확히 말하면 이 책을 사고 싶었지만 무료배송 혜택을 받고자 같이 살 책을 찾고 있다가 <돈의 얼굴>을 샀다고 보는 게 맞겠지만.
클레어 키건의 책은 <맡겨진 소녀>,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읽고 반해서 꾸준히 구매하고 있다. 이번에 나온 신작 <너무 늦은 시간>은 이전작과 비슷하게 얇은 책이고 그래서 금방 읽을 수 있지만 두고두고 곱씹게 하는 묵직한 메시지를 준다. 메시지의 무게는 작년 이맘 때 읽은 <푸른 들판을 걷다>와 유사한 느낌이다. 하지만 색은 그때보다 더 진해졌다. 표제작 <너무 늦은 시간>을 비롯하여 세 편의 단편이 담겨있는데, 프랑스에서 출간할 때는 이 책 제목이 <여성혐오>로 바뀌었다고 한다. 그 이유를 알 수 있을만치 여성혐오에 대해 깊이 다루고 있다. <푸른 들판을 걷다>에서는 '어, 이 작품에 나오는 남자들 성향이 보수 성향의 우리나라 남자들과 비슷한데' 정도의 생각이 들었다면, 이번 작에서는 "대놓고" 보여주기에 '이 주인공 남자나 우리나라의 남성우월주의 사상을 가진 남자들이나 다를 게 뭐야?'라는 생각이 든다.
너무 늦은 시간
<푸른 들판을 걷다>를 읽고 나서 아일랜드 역사, 아일랜드인들의 특징에 대해 알아본 적 있다. 그리고 알게된 것 중 하나가 아일랜드가 가부장적 분위기가 센 편이고 그래서 한국의 보수 성향 남자들과 아일랜드 남자들이 많이 비슷하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이 소설을 읽으면 정말 판박이다. 이렇게 비슷할 수가 있나? 싶다. 정확히는 남성우월주의 혹은 차별주의자라고 보는 게 맞겠다만.
p34-35의 대화는 가부장적 남자들이 가진 '결혼에 대한 환상 및 착각'을 가장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냥 당신이 여기 같이 있고, 같이 저녁을 먹고, 아침에 같이 일어난다고만 생각했지."
이 한 문장이 이 소설의 모든 걸 축약하는 느낌이라고 생각했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라고 생활했던 두 사람이 하나의 살림으로 합치는데 어떻게 그 사람이 그냥 내 생활의 일부가 된다고 생각할 수 있단 말인가?
또한 p38-39의 대화는 가부장적 남자들이 여성을 대하는 태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내가 이 집에서 저녁을 만들었을 때 당신은 고맙다는 말을 한 번도 안 했어. 식재료를 산 적도 없고, 아침 식사를 차려준 적도 없어."
"당신, 여성혐오의 핵심이 뭔지 알아? 안 주는 거야."
내가 생각하는 여성혐오의 핵심은 동일한 권리를 가진 인간으로 안보는 것이다. 근데 그걸 축약하면 결국 "안 주는 거"겠다 싶다.
p44에서 남자 주인공 카헐은 뒤늦게 오래 전 어머니가 겪은 일을 생각하고 '아버지가 다른 남자였다면, 그때 그 모습을 보고 웃지 않았다면' 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내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날린다.
그야말로 너무 늦은 시간이 되어 버린 것. 그는 영영 그런 상태로 지낼 것이다. 그렇게 외롭고 고독한 상태로.
한편 카헐과 결혼 직전까지 갔지만 과감히 무효화한 여자 주인공 사빈의 결단력은 대단하다. 카헐 같은 남자를 만났지만 주변을 의식해서, 이미 많은 단계를 진행시켜서, 일단 살고 아니다 싶으면 이혼하면 된다는 꾐 아닌 꾐에 빠져서 어쩔 수 없이 결혼한 여자가 얼마나 많은가? 빨리 사랑에서 빠져나와서, 그걸 깨달아서, 그리고 실행해서 멋진 여자였다.
길고 고통스러운 죽음
두 번째 작품은 내용도 내용인데 하인리히 뵐의 집에 대해 알아보게 했다.
https://m.blog.naver.com/bonnie000/223713088504
Heinrich Böll cottage_ 책 속 장소
‘The Long and Painful death’는 <Walk the blue fields> 안에 첫 번째 단편소설이다. 이 소설...
blog.naver.com
위 블로그에서 잘 다루었다. 아일랜드 아킬 섬에 실존하고, 실제로 작가들을 위해 장소를 제공한다.
구글맵에서 찾아본 링크는 다음과 같다.
https://maps.app.goo.gl/VyPyqi9sGjpyrTcd6
Heinrich Boll Cottage · Slievemore Rd, Doogort, Co. Mayo, 아일랜드
건축물
www.google.com
이 하인리히 뵐의 집에 들어갈 행운을 잡은 '그녀'가 주인공이다. 독문학 교수라는 사람이 찾아와 매우 무례하게 굴고 그녀의 작업을 방해한다. 주인공은 교수에게 예의를 다하지만 교수는 그녀가 이런 기회를 잡아놓고 한가하게 놀기나 한다며 꾸짖는다. 이는 어디서 많이 본 풍경이다. 사람이 일만 하고 살 수는 없는데, 일하는 중간에 다른 무언가를 했다고 꾸짖는, 일할 줄 모르는 멍청한 상사의 대표적인 모습을 보는 느낌이랄까? 특히나 창작 일을 하는 사람에게 있어 색다른 경험, 낯선 체험, 제대로 된 휴식은 영감을 불러 일으키는데 엄청나게 도움이 될 텐데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힘없이 물러나지 않는다. 그녀가 강단있는 사람이라는 건 체호프의 단편 이야기 언급과 복수의 남성에게 청혼을 받은 적 있지만 그때마다 결국 그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았다는 대목에서 알 수 있다. 그녀는 무례한 이를 내쫓은 후 작가의 무기인 창작과 글쓰기가 얼마나 매서운 무기인지를 보여준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 이 소설의 결말이 매우 소름돋았다.
남극
김애란의 <비행운>이 떠오르는 소설이다. 색다른 추억(?)을 만들어보고자 비행운(飛行雲)의 꿈을 꾸지만 결국 비행운(非幸運)의 악순환에 빠진.
18. 비행운 - 김애란
2024년 7월에 읽은 일곱 번째 책. '비행운'은 새로운 삶을 동경하는 형식으로(飛行雲), 하지만 현실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연쇄적 불운(非幸運)에 발목 잡힌 '우리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책
kim-lotus-root.tistory.com
다만 다른 점은 김애란의 <비행운>은 '불우한 상처와 그 아픔을 함께 아파하기의 형식(p347, 해설 중 발췌)'이라면 <남극>은 함께 아파하기가 되지는 않는다. 그저 '쯔쯧... 그러게 왜......' 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아마 처음부터 주인공의 일탈에 공감할 수 없었기에 더욱 그랬던 것 같다.
그러고보면 김애란의 <비행운>도 해외 진출을 했을까. 한강 작가만큼 뜰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충분히 인정받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내돈내산이자 내가 쓴 독후감/서평/책 리뷰 76편 : 너무 늦은 시간 (클레어 키건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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