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제가 뽑은 21세기 최고의 책에 뽑을 정도로 과거에도 높게 평가했던 책입니다. 최근 어떤 일 때문에 다시 읽게 되었는데 그간 겪은 것들이 있다보니 당연히(?) 예전에 읽을 때와 감상의 차이가 났습니다. 하지만 감상 그대로를 적기에는 제가 누구인지 특정될 우려가 있다고 생각해서 실제 느낀 내용보다 줄여서 적습니다.
참고로 저는 IT 업계에 종사하는 수많은 인물 중 한 명에 불과하나 제가 어느 회사에 다니는 누구인지를 이 블로그에서는 밝히고 싶지 않아 위와 같이 결정했습니다.
이 책을 처음 읽은 때는 이 책의 1부에서 다룬 회사와 유사한 회사에서 나와 다른 회사로 이직한지 얼마 안된 시점이었다. 당시의 감상을 메모지에 적어 책 사이 끼워뒀었는데 옮겨 적으면 이렇다.
이 책은 1부와 2부로 나뉜다. 1부는 전자책 스타트업과 믹스 패널(Mixpanel) 이야기. 2부는 깃헙(Github) 이야기.
1부는 내가 회사생활 하면서 정확히는 IT 업계에 대해 '과연 이러는 게 맞아?' 생각이 들던, 현타왔던 순간들을 다 묶어놓은 종합선물세트? 느낌. 제목대로 내내 불쾌한 골짜기를 오가는 느낌. 우리가 만들고 있는 건 어쩌면 헉슬리가 경고한 <멋진 신세계> 일지도.
2부는 사회적인 문제를 더 많이 지적해서 재미는 좀 덜하다. 2부에서 다룬 이직한 사람이 겪는 심리적 감정이나 성차별 이슈 같은 건 공감가는 면도 있고 재밌긴 했는데 그 외는 좀 지루하기도 했다.
저자에게 가장 감탄한 건 회사를 표현하는 방식이다. 절대 직접 언급을 안하지만 표현만으로 알 수 있는 회사명 표현. 그런 글재주, 표현력은 정말 존경스럽고 부럽고 배우고 싶다.
다시 읽은 시점에 든 생각은 1부(도 역시 공감이지만) 못지않게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2부에 공감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그 때보다는 서로 다른 유형의 스타트업을 더 객관적으로 보게 되고 한편 그립기도 했다. 또한 회사 유형이 스타트업이냐와 상관없이 저자가 하던 업무에 대해 과거와 현재의 내 업무를 돌아보게 되기도 했다. 특히 2부에서 저자가 겪었던 일을 다시 읽으면서는 머리를 감싸쥐었다. 과거의 내가 이 책을 읽을 땐 머잖아 내가 2부와 유사한 상황을 겪을 거라고 꿈에도 생각지 못했으니까.
1. 출판계에서 일했던, IT와 관련없던 저자는 아마존으로 인해 눈을 뜬 느낌이다.
그런데 출판계와 IT계는 꽤 닮은꼴인가 생각이 들었다. 정확히는 과거의 IT 업계를 보는 듯 하다. 박봉, 힘든 취업, 높은 이직률... 다만 2025년의 IT업계는 세계적 불황의 영향으로 과거보다 취업이 힘들어져 이직률은 다소 떨어진 듯 보인다.
그리고 음... 특히 '전자책' 챕터는 모 회사에 다닐 때 내가 보고 느낀 것과 매우 유사하다고 느꼈다.
2. 이 책을 읽으며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 중 다른 관점으로 보게 된 내용이 몇 가지 있다. 그 중 하나가 p38의 내용이다.
주인 의식을 가질 것, 긍정적으로 행동할 것, 그리고 자기 의견을 낼 것.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이게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고 이런 행동 지침에 부정적으로 생각한 적이 없다. 그러나 이에 대한 저자의 반응을 보며 이런 지침이 '폭력적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3. IT업계 중 규모가 큰 곳들은 플랫폼의 힘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나라만 해도 네이버, 카카오가 그러하다. 그런데 이 플랫폼의 문제점을 이 책에서는 여과없이 보여준다. 과거 해외 여행 중 한 식당에서 한국인 개발자와 합석한 적 있다. 그는 플랫폼 비즈니스에 회의감을 느끼고 퇴사한, 이름 들으면 다 알 회사 출신의 개발자였다. 그와의 대화를 통해 오만가지 감정을 느꼈고 내가 묘하게 '이 업계는 뭔가 이상하다, 뭔가 잘못하고 있다, 근데 그게 뭔지 모르겠다' 고 생각했던 그 실체의 실마리를 조금은 안 느낌이었다. 바로 그 사람이 지적했던 플랫폼의 문제점을 이 책에서 다시 보게 되었다.
4. 보안에 대한 불편한 진실도 나온다. 나도 저자와 같은 이유로 개인 정보에 민감해졌다. 누가 내 데이터를 어떻게 들여다볼지 어떻게 아는가? 그런데 많은 회사들은 이에 대한 죄책감 따위 없으며 심지어 훗날 규제가 생기면 적반하장의 자세로 나오기도 한다.
5. 어느 회사를 다니던 늘 듣던 말이 있다.
p97 / "지금은 전시 상태입니다."
이건 테크업계만 그런 거 같지도 않다. 어느 회사나 똑같다. 늘 위기라고 한다. 그를 근거로 직원들에게는 이익 배분을 하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경영진들은 항상 많은 이익을 챙긴다.
6. p132~145의 이야기는 친구들과 다른 세계에 있음을 저자가 느끼는 대목으로, 한 줄 요약하면 "내가 아는 가장 똑똑한 친구들이 왜 여기서 일하지 않느냐"라고 볼 수 있다. 이 부분을 읽으며 이 책이 왜 <멋진 신세계>의 현실판인지 느끼게 됐다. 그 책처럼 대놓고 계급화가 이뤄진 사회는 아니지만 '다름'을 '시비(옳고 그름)'로 보는 사람들이야 말로 <멋진 신세계>를 만들고 있는 것.
7. p191에 언급된 "회사 문화가 죽어가고 있어." 라는 문장은 처음 읽을 때와 지금의 감상이 다른 대표적인 부분이다. 처음 읽었을 땐 어느 정도 성장한 스타트업을 다녀본- 특히 폭발적 성장기 전부터 그 후까지 시기에 다녀본 사람은 모두 공감할 문장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의 생각은 좀 다르다. 회사는 사람이 움직이는 것이고 결국 생물 같은 것이다. 스타트업이든 대기업이든 이전과는 달라진다. 달라진 모습은 대개 이전에 다녔던 사람들 맘에는 들지 않게 된다. 다니고 있던 사람들은 이전의 모습에 만족해서 재직 중이었을테니.
8. p205부터 언급된 '어딕션'에 대한 불편함은 내가 모 회사에서 느낀 불편함과 일치한다. 축약하면 내가 가진 직업 윤리와 회사에서 내가 해야만 했던 업무 성격이 충돌하는 상황인데, 이런 경우는 보통 이직을 택하게 된다. 이 책에서도 결국 저자가 깃헙으로 이직하는 복선이 되었다고 느꼈다.
9. 저자가 깃헙에 이직할 때 그 회사는 성차별 스캔들이 터진 상황이었고 그래서 망설이는 요인이 되었지만 저자는 오히려 그런 일이 터졌으니 그 회사에 합류할 적기가 아닌가 생각한다. 흔히 말하는 '저점매수의 기회'라고 생각한 것 같다. 나도 이직할 때 비슷한 경험이 있다. 어떤 스캔들이 터진 회사였고 최종합격 해놓고도 '저런 회사를 굳이 가야하나?' 망설였다. 고민의 결론은 '그래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기회를 주는 곳이 여기고, 사건이 났으니 오히려 내가 들어간 후는 좀 개선된 상황 아닐까?' 하며 입사했었다. 그 결정에 대한 결과마저 이 책과 유사하다.
10. p245에는 흔히 말하는 '고인물' 이야기가 나온다. 이 책에서는 '초창기 직원'이라고 표현하고 예전을 추억하는 아련한 이미지다. 사실 우리나라 테크업계에서 조리돌림 대상이 되곤 하는 '고인물'이 따지고 보면 이 초창기 직원인 경우가 많다. 고인물들 때문에 회사가 발전이 없거나 뉴비들이 적응하기 어렵다는 툴툴거림이 자주 나온다. 내 경우 이에 대한 생각은 좀 반반이다. 발전 없이 썩거나 오래 다닌 게 직위이고 재산인양 구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오래 다닌 사람들이 있기에 긍정적으로 지켜지는 부분도 있다는 걸 나도 시간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11. <불평등> 챕터에 나오는 내용은 "우리는 능력만 본다", "우리는 차별 없다", "노력하면 되지" 등등의 말을 하는 케이스가 얼마나 허무맹랑한지를 잘 보여준다. 처음 이 책을 읽을 때만해도 내가 능력주의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을 때라서 그저 '뭔가 조금 잘못된 거 같다'는 느낌으로 끝났었는데, 지금은 능력주의의 문제점도 전보다 많이 알게 되었고 또 직접 겪은 것도 있다보니 이전보다 더 구체적으로 보이는 부분이 있었다. 솔직히 내 의견을 적자면 대놓고 차별하는 전통적 대기업보다 '능력만 있으면 인종 성별 학벌 등등 뭐든 상관 없음' 이라고 말하면서 실직적인 차별을 하는 테크 업계가 더 위선적이고 엉망이라고 느낄 때가 많았다. 특히 겉으로는 저렇게 내세우다보니 어떤 이가 차별당하는 경우 차별을 '증명'하는 데 훨씬 더 많은 노력이 든다고 느꼈다.
12. <외부인> 챕터는 과거 퇴사했던 모 회사의 재입사를 고민했던 시절이 떠올랐다. 결국 재입사하지는 않았고 그 대신 선택한 회사는 이전 회사보다 훨씬 좋지 않았다. 그래도 그 때 '내가 원하는 일 아니면 안가겠다'는 이유로 거절한 건 잘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만약 내가 원하지 않는 일인데도 억지로 갔으면 과거 그 회사에 대한 좋았던 기억마저 망가졌을 수 있으니.
13. p280에는 많은 사람들이 '쉽게 퇴사하지 못하는 이유'를 보여준다.
p280 / “그럼 그냥 관두고 좋아하는 일을 찾아보지 그래?“ (중략) 돈과 의료보험 그리고 라이프 스타일 때문이라고, 나는 솔직히 대답했다.
직장인의 가장 큰 장점, 그리고 동시에 족쇄. 그건 매달 나오는 고정적인 수입과, 4대보험과, 그리고 사원증과 월급 덕에 누리는 많은 혜택들이다. 솔직히 이걸 포기하기 쉽지 않다. 3번에서 언급한, 플랫폼 비즈니스에 회의적인 시각을 갖게 되어 퇴사한 개발자분과 대화하고 공감하면서도 당시 쉽게 결단을 내리지 못했던 이유도 이것들이었다.
14. 이어 저자가 일에 대한 철학이 바뀌는 대목이 나온다.
p281 / 일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어쩌면 테크 업계뿐 아니라 우리 세대 전반의 특징인지도 몰랐다.
p282 / 일이 시간과 노력을 돈과 맞바꾸는 거래라는 사실을 왜 이렇게까지 쉬쉬하는 거지? 이미 다들 그렇게 일하고 있는데. 나는 진심으로 궁금했다. 왜 재밌어서 일하는 척해야 하는 거야?
사실 과거의 나도 일이 재밌어서 한다는 환상에 사로잡혀있었다. 그리고 일이 재미없어지면(그것이 내 내적인 이유이건, 회사의 변화에 따라 내 업무가 바뀐 상황이든) 재밌는 일을 찾아 이직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일은 그냥 일이다. 잠시의 재미를 찾을 수는 있지만 오래 가지 않는다. 특히나 사피엔스 - 유발 하라리에 언급된 바와 같이 역사는 개개인의 행복에 관심이 없다. 그렇지만 개개인을 어르고 달래고 끌고 나가야 역사의 진보가 있기에 현대 사회에서 택한 방법이 '일을 통한 성장, 자아실현! 직업 선택의 자유가 있는 현대 사회에서 돈은 부차적이고 일에서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이런 가치관 주입 아니었까? 라는 상상을 혼자 해보았다.
15. 저자는 본인이 비기술 인력이라는 점에 대한 자격지심이 다소 있다. 특히 연봉 대비 할 줄 아는 것이 없다는 자괴감을 토로한다. 아무래도 기술 인력이 주도권을 쥐고 있는 테크계열 스타트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생각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많다. 물론 내가 하는 일을 대체할 사람은 어디든 있는 건 맞다. 그러나 대체자보다 내가 '상대적으로 더 잘할' 수는 있다. 게다가 실제로 그렇게 인정받았다면 그에 자부심을 가지면 된다.
한편 그런 자괴감이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부분도 있다. 내 실력을 기르고자 이것 저것 배웠기에 지금의 내가 있을 수도 있는 것이라 과거의 나를 부정할 생각까지는 없다.
16. 이 책의 후반부, 300 페이지 대의 이야기는 무척이나 쓸 내용이 많지만 이 글 초입에 언급한 것처럼 내가 특정될 우려가 있어 차마 이곳에는 쓸 수 없다. 음... 인상적인 문구를 두 가지만 적어보려 한다. 설명을 덧붙이지 않은 채로, 그냥 그 문장 그대로 인용하며.
p365, 때로 역사는 그렇게 무작위와 우연의 힘으로 움직였다.
p374, 그저 다를 뿐이었다.
17. 이 책의 결말은 저자가 테크 업계를 떠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전한다.
p396, 테크 업계가 주는 안정감을 포기하고 마음이 끌리는 일을 하고 싶어서만은 아니었다. (물론 힘들더라도 마음이 이끄는 일을 계속하고 싶은 것은 사실이었다). 그보다는 순응하며 소모되는 삶을 더는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3번과 13번에서 내가 이 업계를 떠나지 못한 이유를 언급했는데, 지금 다시 한 번 분기점에 있다. 현재 다니는 회사를 떠나는 것은 확정했는데, 업계를 완전히 떠날지는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만약 떠난다면 위 인용한 "순응하며 소모되는 삶을 더는 살고 싶지 않"아서다.
내돈내산이자 내가 쓴 독후감/서평/책 리뷰 70편 : 언캐니 밸리 (애나 위너 저)
'다독다독 2025' 카테고리의 다른 글
69. 몽테뉴의 수상록 - 몽테뉴 (메이트북스 출간) (0) | 2025.04.25 |
---|---|
68. 기차와 생맥주 - 최민석 (0) | 2025.04.22 |
67.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 마이클 샌델 (0) | 2025.04.20 |
66. 당신 인생의 이야기 - 테드 창 (0) | 2025.04.13 |
65. 더 좋은 삶을 위한 철학 - 마이클 슈어 (0) | 2025.04.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