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나는 SF나 판타지 소설에 별 관심이 없다. 소설보다는 인문이나 철학, 또 그보다는 에세이를 선호하는 내 입장에서 SF 소설은 애초부터 읽을 책으로 고려 대상이 아니다. 그런 내가 이 책을 읽은 이유는 알라딘의 21세기 최고의 책 목록을 보다가 이 책을 5명의 작가가 추천했다는 점, 추천 사유가 "과학이 줄 수 있는 최고의 지적 상상력과 소설이 줄 수 있는 최고의 철학적 사유를 선사"한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읽어보니... 와우 세상에!
내가 소설을 쓴다면 이런 걸 써보고 싶다!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좋았다. 음... 내가 읽은 소설 중 이건 찐이다! 라고 생각하는 게 <1984>, <멋진 신세계>인데 (이 책들이 어떤 내용인지 아는 사람들은 대충 내 취향 눈치 챌 듯ㅋㅋ 세 권의 공통점은 뭔가 디스토피아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은 앞서 소개한 책들과는 성격이 다르지만 작가의 상상력과 통찰력에 반해서 리스트에 들어가게 됐다. <이해>, <영으로 나누면>, <내 인생의 이야기>, <지옥은 신의 부재> 네 편이 특히 재밌었다.
아, 혹시나 모르는 분을 위해. 이 책은 테드 창의 중/단편 모음집이다. 과학 소설이다보니 서평을 보면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평도 종종 보인다. 반대로 수학/화학/천문학을 좋아했던 내 입장에선 너무나도 재밌는 책이었다!
바빌론의 탑
사실 이 소설은 걍 그랬다. 유명한 상도 받았다는데 내 취향엔 맞지 않았다. 공감가는 문장들은 있었지만. 그 중 하나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p51 / 이제는 왜 야훼가 탑을 무너뜨리지 않았는지, 정해진 경계 너머로 손을 뻗치고 싶어하는 인간들에게 왜 벌을 내리지 않았는지 뚜렷이 알 수 있었다. 아무리 오랫동안 여행을 해도 인간은 결국 출발점으로 되돌아오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해(understand)
이 작품은 느낀 점도 많고 매우 재밌게 읽었지만 영화화가 결정된 소설이라고 책 표지에 써있어서 자세한 내용은 생략하고자 한다.
와- 이건 넘 재밌다. 진짜 재밌다는 말 밖에 안나온다. 버스에서 이걸 읽는 중 내려야 했는데 그렇게 방해받는 게 싫을 정도로 빠져들었다. 호르몬 치료를 받다 엄청난 지능을 얻게 된 남자. 그를 실험하는 의도를 알고 탈출 후 벌어진 추격전. 이걸 보는 중에 컷하고 내려야 하다니!
p89 / 주입하고, 기다린다.
이 문장은 내가 여태 읽어본 문장 중 가장 나를 긴장시킨 단문이다.
p108 / 그는 지능을 수단으로 보고, 나는 지능을 그 자체의 목적으로 본다.
주인공은 자신과 같은 유형의 사람, 하지만 가치관은 완전히 다른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그 차이를 잘 나타낸 문장이다.
수퍼히어로냐 빌런이냐의 차이는 이런 가치관 차이에서 온다고 생각한다.
이걸 읽은 날은 월요일. 퇴근 후 개인적으로 수강하고 있는 수업을 가는 날이다. 도중에 버스에서 내리느라 끊기고 강의실로 이동하느라 끊기는 상황이 너무 싫어서 결국 강의실에 일찍 들어가 수업 전에 기어코 이걸 다 읽었다.
제목의 understand는 여러 가지의 '이해' 중 어떤 의미일까. 한편 이 작품은 과연 영화화는 게 가능한 일인가. 어떻게 이걸 '이해'하고 풀어나갈 것인가.
0으로 나누면
수학을 좋아하던 내 입장에서는 무척 빠져들 수 밖에 없는 소설이었는데, 마치 스릴러 같다는 느낌도 받았다.
p119 / 어떤 수를 0으로 나눠도 그 값이 무한대가 되는 경우는 없다. 나눗셈은 곱셈의 역이라고 정의되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수를 0으로 나누고 그다음 0을 곱하면 처음 수를 다시 얻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무한대에 0을 곱하면 0이 되지 다른 수가 되지는 않는다. 0을 곱해서 0 이외의 값을 얻을 수 있는 수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어떤 수를 0 으로 나눈 결과는 글자 그대로 무정의인 것이다.
나는 이런 이유로 0을 좋아한다. 무정의를 낳는 숫자. 그런데 이 숫자로 이런 소설을 만들 수 있다니?
그냥 보면 한 부부의 위기 이야기이고 그것도 맞다. 가치관의 차이가 오는 갈등과 위기니까. 그 가치관은 직업 정신과 그에 대한 예민성이다. 각 장은 n, na, nb(여기서 n은 자연수이다. 예를 들면 1, 1a, 1b 같은 식이다.) 형태로 진행된다. 이건 122쪽에 나오는 "a=1, b=1이라고 하자. 그리고 a=2a 즉 1은 2라는 결론으로 끝난다." 를 인용한 것 같다. 그리고 이 문장이 이 내용 전체를 관통한다.
아마 독자 중 칼의 입장은 이해해도 르네의 입장은 이해 못할 사람이 많을 것 같은데 나는 르네의 입장도 칼의 입장도 이해가 된다. 아무래도 난 수학을 좋아하는 입장이고 (공리가 깨지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불변할 것이라는 것이 수학의 매력이라 생각하기에 르네의 고통이 너무도 절절히 느껴졌다. 나도 마찬가지로 괴로웠다.
나중에 책 뒷부분에 있는 저자의 '창작 노트'를 보니 이런 말이 있다. 이게 작가의 의도라면 나는 제대로 느껴버린 셈이다.
p430 / 수학은 모순된 체계이며 그것이 내포하는 놀라운 아름다움 모두가 실은 환영에 불과하다는 증거와 직면한다는 것은, 내게는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최악의 일인 것처럼 느껴진다.
네 인생의 이야기
영화 <컨택트>의 원작 소설이다. 이 소설은 중편인데, 읽어면서 생각할 거리도 많았기에 감상도 좀 길다.
외계인 언어를 연구하는 언어학자의 이야기인데, 연구 진행 - 딸과의 이야기가 교차로 나온다. 그리고 이건 어느 순간 만나기도 하고(예: p181-인내의 미덕)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는 양 갑자기 굴절되기도 한다.
읽으면서 대체 이 작가 뭐지? 싶었다. 앞서 다른 소설을 읽을 땐 그냥 공대 남자가 맛깔스럽게 창작 잘하네, 정말 상상도 못한 이야기를 펼치네 정도였다면, 이 소설에서 언어학과 수학/물리를 연계해서 다루는 재주가 충격적이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할 수 있다고? 그저 감탄의 연속. 대체 어떻게 하면 이런 글을 쓸 수 있지?
딸에 대한 이야기가 교차로 나오는 건 어떤 의도를 깔고 있을까 생각하며 읽던 중, 206 페이지에서 어떤 추억이 나온 직후 "아, 미안. 잠깐 딴생각을 하고 있었어." 라는 문장에서 '어?' 싶었다. 이런 식의.. 음 액자식 구성이라 하던가? 아무튼 어디선가 분명 접점이 있을 거라 생각했고 한 번의 접점을 이미 181 페이지에서 보았지만 이게 루이즈가 현생을 살면서 이따금 딸에 대한 생각에 빠져드는 상황일거라 예측하지 못했다.
이에 앞부분을 다시 살펴보던 중 177 페이지를 다시 보게 됐다.
p177 / 너는 명백하게, 기가 막힐 정도로 나와는 다르다는 사실. 이 생각은 네가 나의 복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내게 또다시 일깨워줄 거야. 너는 매일처럼 내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소중한 존재이지만, 나 혼자 만들어낼 수 있었던 존재는 결코 아니야.
처음 이 부분을 지나갔을 때는 딸이 루이즈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루이즈가 딸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표현한 거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읽어보니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그 앞서 헵타포드의 문자에 대해 다른 방식으로 가설을 세우면서 '루이즈의 딸은 루이즈의 복제가 아니다, 나와는 다르다' 라고 생각했던 것이 떠오른 것.
이어 다시 187~188 페이지에 눈이 갔다.
p187 / 네가 성장의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속도는 언제나 나를 놀라게 할 거야. 너와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마치 움직이는 목표를 조준하는 것과 같아. 너는 언제나 내 예상보다 앞서 나가 있을 거야.
그리고 그 다음에 페르마의 정리 이야기가 나온다. 목표를 향해 조준하는 빛의 이야기.
p201 / 광선은 어느 방향으로 움직일지 선택하기 전, 자신의 최종 목적지를 알고 있어야 한다.
문득 이 다음에 등장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언어적이지만 비음운적인 방식으로 사고한다는 것.
p203 / 언어는 달라져도 방식은 바뀌지 않았다. 사고란 마음속으로 소리 없이 말하는 과정이었다.
그렇다면 이 액자 구성은 - 비록 언어가 같긴 하지만 - 언뜻 달라보이는 이야기를 하면서 사실은 같은 이야기를 하는 의미 아닐까? 그리고 이 이야기는 루이즈가 딸을 향해 가장 빠른 경로로, 즉 페르마의 원리처럼 가는 내용인 것 아닐까?
p207 / 인류가 직관적으로 받아들이는 물리적 속성은 모두 한 시점에서 어떤 물체가 가지는 성질이다. 그리고 이런 성질은 순차적이고 인과적인 사건 해석으로 이어진다. (중략) 햅타포드들이 직관적으로 받아들이는 물리적 속성들은 일정한 시간이 경과해야만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목적론적인 사건 해석으로 이어진다. (중략) 그리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가장 처음과 가장 마지막의 상태를 알아야 한다. 원인이 시작되기 전에 결과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이쯤부터 의심의 눈초리로 이 소설을 읽기 시작한다. 미래를 예측이 아닌 '아는 것'이 가능한가? 라는 질문을 던지고 바로 그 이후 211 페이지에 '세 살 때 너는 부엌 카운터에서 행주를 잡아당기다가 이 샐러드 볼을 머리에 뒤집어쓰게 될 거야.' 라는 문장에서 흠칫했다. 미래형? 이 이전까지는 '~했던 걸 기억해. 그 때의 너는 몇 살이야' 이런 식으로 전개하지 않았던가? 다시 이전의 내용을 돌아보니 - 아니다. 이건 회상이 아닐 수 있다. 묘하게 미래형으로 볼 수 있는 표현이 눈에 띈다. 그렇다면 사실은 미래를 말하고 있는 건가? <세월의 책>처럼?
p218 / 미래를 안다는 것과 자유의지는 양립할 수 없었다. 나로 하여금 선택의 자유를 행사할 수 있게 한 것은 내가 미래를 아는 것 또한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이와는 반대로 미래를 아는 지금, (중략) 미래에 반하는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다. 미래를 아는 사람들은 미래에 관해 얘기하지 않는다.
이때만 해도 설마?했다. 하지만 결말을 본 순간… 몸에 전율이 흘렀다. 소름이 돋았다. 소설을 읽으며 이런 경험 대체 얼마만인지…? 아마 <언캐니 밸리> 다음이 <소년이 온다>였고 그 이후로 처음인 듯 하다.
그랬다. 미래를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앞서 내가 예측한 것 중 반만 맞았다. 같은 이야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딸을 향해 가는 것은 맞았다. 223 페이지에서 '나의 세계관은 인간과 헵타포드의 혼합물이다.' 라고 구술한 것처럼, 그녀는 미래를 아는 상태에서 현재를 이어가고 있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수미쌍관의 구조인 이 소설은 소름 돋도록 이야기의 핵심과 잘 어울린다.
언어학은 주인공의 전문분야일 뿐 실질 수학과 물리의 이야기이다. '창작 노트'에도 언급되어 있지만 변분 원리에서 출발했고 양자역학을 다룬 이야기. 루이즈가 미래를 알 수 있구나라고 눈치 챌 때부터 이 이야기는 오히려 영화 <인터스텔라>에 더 가깝다고 느꼈다.
첨언. 영화 <컨택트>를 보지 못했지만, 이 소설을 읽다보니 왠지 원작과 영화는 다른 내용인 거 같아서 찾아보게 된 이야기.
첫째. 영화는 보지 못했지만 과연 영화가 이 표현을 따라갈 수 있을까? 흐름은 따라갈 수 있을지언정 이 엄청난 표현을 따라갈 수는 없을 것 같다.
둘째. 나무위키를 안보려고 하는 쪽이지만 영화 내용이 너무 궁금해서 찾아봤다. 읽는 내내 내 얼굴엔 썩소가 떠나질 않았다. 영화계에서는 호평받았으나 원작을 읽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호불호가 갈린다는데 이유를 알겠다. 난 이 영화 내용 반댈세.
셋째. 영화로 나왔을 때 많은 사람들이 언어학 이야기라고 했단다. 영화로 제작하려고 각색할 때 의도적으로 물리 이야기는 떼어냈다고 한다. 아마 대중을 의식한 거 같은데, 결국 각색된 내용도 수학/물리와 완전히 분리할 수는 없다고 느꼈다. 이걸 보고 많은 문과생들이 좌절했다는데 내용을 보면 절대 좌절할 일이 아니다. 그래서 난 이걸 언어학의 이야기로 이해하게끔 각색했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
넷째. 봉준호 감독에게 이 영화 감독 제의가 들어왔었다 한다. 봉준호 감독은 각색된 내용이 원작과 너무 다르다고 본인이 각색하겠다고 했다가 결국 결렬됐다는데. 봉준호가 만들었다면 어땠을까. 너무도 아쉽다.
참고. 이건 <네 인생의 이야기>고 책 제목은 <당신 인생의 이야기>다. 뭔 차이일까? 영어 원제 차이가 있다. 전자는 story고 후자는 stories다. 그리고 후자는 and others가 붙는다.
일흔두 글자
처음에는 도통 이해가 되지 않고 어려웠다. 산업혁명 시대로 보이는 영국에서 명명학은 뭐고 자동인형은 뭐란 말인가. 호문클루스가 뭔지는 검색해보고야 알았다. 연금술로 탄생시킨 인간이라니.
주인공 로버트 스트래튼은 어린 시절부터 낙후된 노동환경에 노출된 이들을 구하겠다는 동기로 자동인형을 개발한다. 좀 나이브한 생각이라 생각했지만 선한 의도는 인정할만 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역시나, 그게 일자리를 뺏을 걸 우려한 윌러비의 반대에 부딪힌다. 마침 스트래튼은 인류의 멸종을 연구한 필드허스트 백작의 제의를 받고 이에 감화되어 연구를 같이 하게 된다. 같이 연구를 하는 사람 중에는 은사였던 애시본 전 교수도 있었다.
이쯤해서 든 생각이 그들이 말하는 자동인형이 AI이고 이름은 프롬프트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읽으니 한결 쉬워졌다만.. AI가 없는 시대에 나온 소설인데 그때는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하는 거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 정자와 난자를 이용한 연구라는 점에서 내 윤리의식을 자극해서 여태 본 작품 중 가장 불편하게 읽혔다.
그러다 후반부, 카발리스트(신비주의자) 벤저민 로스를 만나 협업 제의를 받지만 충돌 끝에 결렬된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냥 시큰둥하게 읽었는데 289 페이지부터 나오는 필드허스트와의 가치관 충돌에 이어 애시본과 함께 하는 '비밀 조직 안에 또 하나의 비밀 조직'을 만들게 되는 부분, 그리고 암살자에게 쫓기는 이야기가 나오면서 긴장감이 높아졌다.
앞 부분과 이 부분의 텐션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그러다보니 후반부는 굉장히 몰입하게 되었는데 이 부분을 위해서 앞에서 그렇게 빌드업을 한 것인가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상황이 정리된 후 스트래튼은 로스의 노트를 보게 되고 이를 힌트 삼아 본인이 어떻게 해야 할지를 깨닫는다. 이 노트 내용과 스트래튼의 아이디어를 보고 있자니 문득 깨닫게 되었다. 나는 현대적 관점에서 AI 및 프롬프트로 이해했지만, 결국 이 소설에서 다루는 기술은 연금술 같은 것이었다. 혹은 판타지류에서 보게 되는, 소환사 및 그 소환사가 외우는 주문 같은 것이다는 걸.
인류 과학의 진화
이건 매우 짧은 글이다. 아니 이게 뭐지? 학술지 내용 같은데.. 하고 나중에 창작 노트를 보니 실제로 네이처 지에 실은 글이란다. 초인간적인 지성이 출현한 후의 학술지는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으로 쓴 글이라고. 문득 초인간을 언급했던 <사피엔스 - 유발 하라리>가 떠올랐다.
사피엔스 - 유발 하라리
하... 드디어 이 책의 차례가 왔다. 25년 2월에 읽은 이 (벽돌)책, 감상문을 어떻게 정리하지? 라는 생각부터 들지만! 느낀대로, 키보드 가는 대로 써보려 한다. 제목 그대로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
kim-lotus-root.tistory.com
테드 창은 긍정적 관점으로 전망하는데 글쎄... 나는 잘 모르겠다.
지옥은 신의 부재
나는 무신론자라서 신에 대한 간증이라느니 천사의 강림이라느니 이런 이야기가 너무 현실감이 없고 그래서 이런 소재야말로 판타지이며 SF처럼 느껴진다. 그런 관점에서 흥미진진하게 읽은 작품이고, <이해> 못지않게 책에서 손을 뗄 수 없는 몰입감을 주었다. 이 편을 읽을 땐 금요일(2025년 4월 11일) 저녁이었고, 원래 일찍 자려고 했는데 이것 땜에 망했다. 끝까지 봐야만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았던 것이다. 저녁 때 읽기 시작한 내가 잘못했지, 뭐...
선천적 기형으로 태어난 닐 피스크는 아내 사라를 나다니엘의 강림 때 잃었다. 이후 사라가 천국에 갔다는 걸 알게 되고, 본인은 지옥에 가게 될 상황에서 어떻게하면 천국에 갈 수 있을까를 갈망한다. 신을 사랑할 수 없다고 스스로 인정하지만 오직 아내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결국 신을 사랑할 방법을 찾지 못한 그는 순례를 통해 천국을 갈 방법을 찾기로 한다.
역시 선천적 기형으로 태어난 재니스 라일리는 자신의 기형을 신이 내린 선물이라고 생각하며 사람들에게 장애는 신에게 받은 사명이라는 강연을 하며 청중을 몰고 다닌다. 그러다 천사 라시엘이 강림할 때 뜻밖에도 그 장애가 없어지며 오히려 자신의 사명이 없어진 것이 아닌지 혼돈에 빠지고 오히려 장애가 다시 나타나기를 소원하게 된다.
이선 미드는 언젠가 설교자가 되고 싶었지만 신앙 체험이 없는 점을 고민한다. 그러다 강림을 겪은 후 혼란이나 불확실함을 느끼는 사람이 자신과 운명이 교차하는 사람일 거라 믿고 재니스 라일리에게 함께하기를 설득한다. 재니스는 이선의 접근이 반갑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받은 선물(장애의 치유)을 반환하고자 순례에 나서기로 한다. 신앙 체험의 기회라고 생각한 이선은 재니스를 따라가기로 한다.
여담인데 순례를 다니며 천사를 찾아다니는 상황이 뭔가.. MMORPG에서 언제 불시에 나타날지 모르는 대형 몬스터를 기다리는 느낌? 이 소설 속 천사는 자연재해 마냥 사람들에게 치유/죽음을 주고 대형몬스터는 때려잡아 보상을 얻으려는 차이가 있지만.
닐의 사라에 대한 사랑은 처음에는 이해 못할 것이 아니었지만 갈수록 집착과 광기로 느껴졌다. p337에서 "그가 지옥에 가고 사라가 천국에 가는 것과, 두 사람 모두 지옥으로 함께 가는 것 중에서 양자택일을 하라면 그는 후자를 택했을 것이다." 라는 문장에서 확신을 얻을 정도였다.
오히려 재니스의 입장이 이해가 되었다고 해야 하나. 물론 그런 사람을 실제로 만났다면 뭔 복에 겨운 소리냐며 나도 비난했을지 모르겠지만, 텍스트 상에서 느껴지는 그녀의 고민 - p329에 나온, "그녀는 자신이 청중들에 대해 가질 수 있는 설득력의 가장 큰 원천을 잃었던 것이다." - 은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이 소설의 결말은 여러 생각이 든다. 닐에 대한 신의 처분은 응당 이해가 되고 재니스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선의 경우는?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운 사람이 잘 되는 게 맞는 걸까? 그 또한 그저 신의 뜻으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연쇄살인마가 천국에 간 것처럼? 역시 나는 종교를 가질 수 없다는 결론으로 귀결됐다. p340에 나온 휴머니스트 운동가들처럼, "신이 그런 고통을 인간에게 안겨주는 행위를 잘못된 일로 간주" 하고, "차라리 스스로의 윤리감에 따라 행동"하여 "죽었을 때, 긍지 있게 신을 무시한 채 지옥으로 떨어지겠다"는 입장인 것.
또한 이 소설을 읽고 나서 일부 기독교인에 대한 비판적 시선이 생겼다. 이 작품은 종교 소설로 볼 수 있을 정도로 신, 복음, 기적, 지옥과 천국, 자살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에서의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나는 무신론자다보니 새로운 분야를 탐구하듯 읽었다. 그러다 문득 '운'에 대한 기독교의 철학을 주시하게 됐다.
공정하다는 착각 - 마이클 샌델 및 더 좋은 삶을 위한 철학 - 마이클 슈어에도 언급된 것처럼, 운의 영역은 인생에서 무시할 수 없는 요소다. 그런데 기독교야말로 '운'을 가장 강하게 말하는 종교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p321에서 강림을 표현한 부분을 보면 "강림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축복을 가져다주는 한편 다른 사람들에게는 재앙을 가져왔다."고 하고, p332를 보면 이선은 그다지 독실하지는 않은 가풍에서 자라났지만 그의 부모는 "자신들이 향유하는 평균 이상의 건강과 쾌적한 경제적 지위를 신의 은총으로 돌렸다"고 한다.
그럼에도 오히려 왜 신을 믿는 사람들이 더 능력주의를 주장하는 듯이 보일까? 하는 점이 나를 고민에 빠뜨렸다. 기독교가 자신의 신앙이라면서 능력주의를 강하게 신봉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종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거나 왜곡하고 있는 것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 불안 - 알랭 드 보통에서 언급된, 불안을 해소하는 방법 중 하나로 기독교가 언급된 것도 이해가 되었다. 그 책에서는 '운'에 대한 영역이 아니라 '삶의 유한성'에 대한 인정을 언급한 것이긴 하다만.
외모 지상주의에 대한 소고 : 다큐멘터리
미를 판단하지 않게 하는 "칼리"에 대해 적용하느냐 마느냐에 대한 논쟁을 담은 다큐멘터리 형식이다. 주 발언자는 타메라 라이언스다. 그녀는 고등학교 때까지 칼리를 했었고, 대학교 와서 그것을 없애는 것을 기대했는데, 대학에서 의무화를 추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어 부정적 반응을 내비친다. 이후 전개는 칼리에 대한 의견을 듣고자 다양한 사람들을 인터뷰하며 중간 중간 타메라의 이야기를 싣는다.
이것을 읽으며 이 이야기의 흐름이 어떻게 되느냐가 결국 저자의 견해일 거라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 중반에도 나오지만 외모를 보고 아름다움/추함을 느낄 수 있느냐 아니냐는 각각의 장단점이 있기에 찬성하는 쪽도 그 논리가 이해되고, 반대하는 쪽도 이해되기 때문이다. 특히 내가 공감했던 양측의 의견을 각각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p375 / 얼굴이 예쁘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수동적인 특징입니다. 예뻐지기 위해 노력하더라도 그건 수동적인 노력에 불과합니다. 저는 타메라가 자기 자신의 가치를 판단하는 데 있어, 자신이 얼마나 예쁜지가 아니라, 정신과 육체 모두를 함양해 자기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기준으로 삼기를 바랐습니다.
p408 / 칼리 운동은 여성이 자신의 용모에서 기쁨을 얻는 행위 자체에 대해 죄악감을 느끼도록 강요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여성의 성을 억압하려는 또 하나의 가부장적 전략에 불과하고, (...) 물론 아름다움이 지금껏 억압의 도구로 쓰여온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아름다움을 아예 말소해버리는 것은 결코 해답이 아닙니다.
사실 어떤 얼굴이 예쁘다- 라는 가치 판단은 사회문화적 요인이 크고 절대적이지 않다. 하지만 그것은 달리 말해 자본이 침투하면 가치를 바꿀 수 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또한 미를 판단할 능력이 사라진다는 것은 뷰티 업계에 치명적인 사건이기도 하다. 그러다보니 이 논쟁 과정에 자본의 힘이 들어가게 된다.
한편 타메라는 칼리를 없앤 덕에 자신이 예쁘다는 걸 알게 되고 전남친 개럿도 미를 판단할 수 있게 되면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으로 개럿에게 칼리를 끄도록 권한다. 하지만 이런 저런 사건을 겪으며 결국 타메라도 칼리를 다시 켤까 고민한다. 이 이야기에서 내내 암시가 있었는데, 타메라가 성숙한 생각을 가졌고 자신의 잘못을 금방 인정한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멋진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p423 / 아름다움 자체는 문제가 아니에요. 그걸 오용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 문제인데 칼리는 바로 그런 점에서 유용해요.
마지막 '창작 노트'를 보면 저자는 본인이라면 칼리를 해봤을 거 같다고 한다. 나는...? 글쎄 모르겠다. 지금의 나에게 굳이 필요하지 않은 거 같다. 이 소설에 나온 것처럼(p375) 나이를 먹으면 외모 문제에 관해서도 좀더 능숙하게 대처할 수 있게 된다. 내 주관이 뚜렷해져 광고에도 그다지 흔들리지 않는다. 그런데 내가 광고 같은 것에 잘 현혹되는 스타일이라면 고민해봤을 거 같다.
내돈내산이자 내가 쓴 독후감/서평 66편 : 당신 인생의 이야기 (테드 창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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