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다독다독 2024

정보의 지배 - 한병철

by 김연큰 2024. 11. 22.

어떤 분야에서 일한다는 건 남들이 알기 어려운 그 분야의 민낯을 마주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는 IT 업계에서 쭉 일하면서 여러 서비스를 접해봤고 일하는 과정에서 개인정보에 민감해졌다. 그 정보를 이용해 어떤 식으로 활용하는지를 다양하게 본 영향이다. 그래서 나는 어딘가 회원가입을 할 때 약관 선택 동의 항목은 가능한 동의하지 않고, 약관이 변경될 때 그 방향성에 있어 내가 생각한 '선'을 넘는다는 생각이 들면 아무리 애용하던 서비스라도 과감히 탈퇴하기도 한다.

 

정보를 가공한 결과물로 고객들을 향한 마케팅을 하는 자체는 죄가 아니다. 다만 그 영향으로 고객들 스스로가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자신의 방향성이 바뀐다면 그건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1984>, <멋진 신세계> 같은 류의 책에 깊이 공감했고 비슷한 책에 관심이 많았다.

 


 

2024년 1월에 이 책을 만났다. 김상욱 선정 2023 올해의 책이라는 목록에서.

그의 추천사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지금은 정보화 시대다. 많은 이가 정보의 공유가 민주주의를 업그레이드할 거라 기대했다. 하지만 이 책은 정보야말로 민주주의가 직면한 최악의 적일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정보화 시대에서 우리를 착취하는 것은 억압적인 규율권력이 아니라 자발적인 자기 자신이다. 정보의 공유는 개인정보만 투명하게 만들고, 정보공유 알고리즘은 시커먼 블랙박스다. 사람들은 흥미로운 정보만 추구한다. 유권자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제각각 자신에게 흥미로운 뉴스만 전달받는데, 그 뉴스들은 서로 모순되기도 하고 때로 개소리에 가까운 정보도 많다. 이렇게 민주주의의 공론장은 파편화되어 사람들을 극도로 분열시킨다. 결국 그들은 유권자가 아니라 투표가축으로 전락해 간다. 민주주의는 지루한 협상과 기나긴 인내를 필요로 하는 느린 호흡의 제도다. 하지만 우리는 스마트폰에서 1분도 기다리기 힘들다. 정보의 전파 방식과 소비 패턴은 민주적인 과정을 훼손할 수밖에 없다. 정보화 시대의 의미를 비판적으로 되짚어 볼 기회를 주는 책이다.

 

"정보화 시대에서 우리를 착취하는 것은 자발적인 자기 자신"이며 "정보의 공유는 개인정보만 투명하게 만들고, 정보공유 알고리즘은 시커먼 블랙박스다" 라는 문장에서 이 책은 반드시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구매했다.

 

그런데 이 책 좀 특이하다. 한국인이 작가인 거 같은데 한국인이 옮겼네? 하고 보니 저자가 재독 철학자라 독일어판이 원작인 모양이다. 그래서 낯선 용어가 등장하는데 출판사의 책 소개에 있는 이 문장을 인용하여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책의 주제이자 독일어판 원제이기도 한 '인포크라시(Infokratie)'는 저자가 새로이 발굴해 사용하는 개념어로, 정보체제 내에서 민주주의(Demokratie)를 대체하고 있는 새로운 지배 형태를 뜻한다.

 

<인포크라시>는 책 내용에도 자주 등장하고 목차 중 하나를 이루기도 하기 때문에 이 책을 이해하려면 꼭 알아야할 단어다.

 


 

초반엔 좀 지루했는데 마지막 두 챕터에서 매우 흥미롭고 속도감 있고 흡입력 있게 읽었다. 특히 끝에서 두 번째 챕터는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세 번 반복하여 읽었다.

오웰의 <1984>,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를 아직 읽지 않은 사람이라면 같이 보면 좋을 거 같다. 내가 이렇게 추천하는 이유는 이 책 9 페이지와 33 페이지에 있다.

 

이 책이 경고하는 바는 불편할 수 있지만 한편 정보의 속성에 대해 인정하고 납득할 수 밖에 없는 부분도 꽤 많다.

특히 요즘 세상 돌아가는 걸 조금만 살펴보면 이 책에서 말하는 메시지가 단순 기우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기에. 책 속에서 언급한 정치 분야까지 갈 것까지도 없고 온라인 커뮤니티만 봐도 알 수 있다.

 

이 책에서는 임계점을 넘어서는 다양한 정보는 불신을 강화하여 불신사회를 만든다고 한다. 내 경험으로도 맞는 말이다. 정보를 접하면 접할수록 어느 게 진짜인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럽다. 현대 인간은 과거에 비해 접하고 처리하는 정보량이 수십배에서 수백배에 이른다는 글을 다른 곳에서 본 적이 있는데, 어쩌면 그래서 ChatGPT와 같은 AI 서비스가 각종 정보를 긁어서 재가공하여 제공하는 것에 점점 많은 이들이 의존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20세기는 히틀러 같은 독재자가 문제였지만 21세기 및 그 이후는 정리된, 그러나 알고 보면 편향된 것일 수 있는 정보가 문제일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파레시아'(참되게 말하기)를 실행하는 것 외에 어떤 해결책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 그냥 그것 뿐인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민주주의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상태가 된 거 아닐까. 회사에서 이런 걸 해본 적 있지만 참으로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이기도 한데 이걸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할 수 있을까. 생각할수록 앞날이 참으로 어둡다.

 

여기까지 쓰고나서 저자인 한병철의 후속 서적을 보니 <오늘날 혁명은  불가능한가> 이다.  책을 읽어보진 않았지만   말미에 파레시아를 혁명 활동이라 했는데 결국 미래는 비관적인 것인가?

 


 

AI에 대한 사견을 덧붙이면 AI 윤리 체계가 아직 명확히 잡히지 않았고 할루시네이션(정확하지 않거나 사실이 아닌 조작된 정보를 생성) 문제도 존재하여 참고는 하되 맹신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또한 AI 기술을 이용해서 사진 배경을 조작하는(뒤에 찍힌 낯선 사람을 지운다던가 하는 식의) 것이 사람들이 좋아할 기술이긴 하겠지만 그 자체의 위험성이 걱정된다. 훗날 어떤 게 진짜이고 어떤 게 가짜인지 구분할 수 있을까? 악용될 여지가 과연 전혀 없다고 할 수 있을까? 그래서 나는 절대 사진을 편집하는 AI 기술은 사용하지 않는다.